[만나고 싶었습니다] 팝페라 가수 카이

음악 교사 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KBS 어린이 합창단을 시작으로 ‘음악의, 음악에 의한, 음악을 위한’ 다부진 행보를 펼쳐온 젊은 음악인이 있다. 그는 서울예고 수석 졸업, 서울대 성악과 학사·석사, 각종 콩쿨 입상 등 숱한 이력을 쌓으며 클래식 성악가가 되기 위한 ‘정통 엘리트 코스’를 차근차근 밟아왔다. 하지만 현재 그의 발걸음은 성악 유망주의 탄탄대로에서 살짝 비껴나 클래식과 팝이 결합한 크로스오버 음악 장르 ‘팝페라’로 향해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서른 한살 팝페라 가수 카이(정기열·성악과 박사과정). 청담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나 그가 풀어놓는 진솔한 음악 이야기에 대해 들어봤다.

1장, 몇 방울의 재미를 연료 삼아 … 

 2008년 크로스오버 앨범 『미완』으로 데뷔한 이래 그는 줄곧 팝페라 가수라고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다들 저를 팝페라 가수라고 불러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면서도 “내가 팝페라라는 규정에 맞춰진 가수라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딱 잘라 말한다. 그렇다면 그의 음악은 과연 어떤 것일까.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음악이 분명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경계에 놓여있긴 하나 한 장르로 명확하게 구분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한다. 장르에 대한 규정에 얽매이기 보다는 음악가가 대중과 즐거운 호흡을 이어가는 것 자체가 그에게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음악에서 예술성뿐 아니라 재미도 중요하다고 봐요. 제가 음악을 시작한 것 역시 곡을 연주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가 즐거움을 공유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됐거든요.”

 즐거운 음악을 향해가는 출발점은 클래식이었다. “클래식은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음악”이라고 스스럼 없이 말하는 그는 클래식을 십분 살리면서도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디에 어떤 길이 있는지 몰라 그는 좌충우돌만 거듭했으나 2002년 한국에서 초연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보면서 고민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했다. 그는 “성악가들이 무대에 올랐음에도 좋은 서사와 음악이 결합해 오페라 특유의 딱딱함보다는 친근함이 느껴지더라”며 “클래식을 기반으로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있음을 깨닫게 됐다”고 말한다. 2년 뒤 해외 남성 4인조 팝페라 그룹 ‘일 디보’의 음악까지 접하게 되며 클래식 음악의 매력과 대중친화적 요소를 한데 끌어안는 크로스오버 음악 가수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는 데뷔 이후 가수로서 꾸준히 앨범을 내는 것 외에도 현재 라디오 DJ와 뮤지컬 배우 등으로 활약하며 다양한 영역에서 음악을 통해 대중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펼치고 있다. 3년째 KBS 1FM ‘생생클래식’의 DJ를 맡은 그는 “푸치니 오페라 작곡의 뒷이야기같이 클래식을 둘러싼 흥미진진한 내용을 음악과 함께 전하고 있다”며 “클래식 프로그램의 지루한 이미지를 벗고 청취자들이 클래식을 쉽게 이해하도록 돕고 싶다”고 넌지시 자신의 목표를 내비친다. 또한 뮤지컬도 음악을 통해 그와 대중과의 거리를 한층 좁혀주는 존재다. “관객석 첫 줄이 무대로부터 20m나 떨어져 있는 오페라와 차이가 난다”는 점은 물론이고 다양한 창법을 구사하며 “무대 바로 앞에서 관객과 익숙한 노래로 호흡을 맞춰갈 수 있다”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올 8월에 개막될 뮤지컬 「두 도시 이야기」에 캐스팅 된 그는 관객과의 즐거운 만남을 앞두고 들뜬 표정이었다.

사진 제공: 유니버셜 뮤직 클래식

2장, 힘들었던 그 시절의 서사

 “저보고 ‘일탈’을 했다고 하더군요.” 우수한 성적과 기량으로 성악가 코스를 밟아오던 그가 돌연 정통 클래식을 따르지 않고 팝페라를 택했을 때 일었던 후폭풍은 컸다. 클래식의 정도(正道)를 벗어나려는 그의 움직임에 가장 먼저 냉랭한 시선을 던졌던 것은 학교였다. 그는 “내 선택을 두고 주변 많은 분들이 우려를 표했다”며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학교 수업에서 너를 채점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교수님도 있었다”고 당시 분위기를 떠올린다. 그는 ‘“정통 성악에서 제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서 괜스레 저런 음악을 한다”는 수군거림까지도 견뎌야만 했다.

 데뷔 당시만 해도 비주류 음악으로 여겨지던 팝페라의 위상 역시 그에게 힘겹게 다가왔다. 우선 팝페라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는 “당시에 팝페라와 관련해 가르침을 받을 곳이 없었다”며 “대중 가수 트레이너나 뮤지컬 하는 분들을 찾아가보긴 했지만 홀로 고민하던 시간이 많았다”고 기억을 더듬는다.

 고비를 넘겨 준비한 끝에 앨범을 냈으나 그 이후에는 사람들의 무관심과 맞닥뜨리게 됐다. 성악의 기본 토대에 팝적인 리듬과 비트를 끌어들이거나 팝을 성악 발성으로 부르는 크로스오버 음악이 사람들에게는 낯설었던 탓이다. 그는 “나의 음악은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며 “가요계에 앨범을 가져가면 클래식계로 가라 하고 또 클래식계는 가요계로 떠밀기만 했다”고 씁쓸히 말을 잇는다.

 하지만 녹록하지 않은 길을 택한 그에게 격려와 응원의 손길을 보내준 이들도 있다. 학부생 시절 지도교수였던 박인수 전 음대 교수는 기댈 곳 없던 음대에서 새로운 음악에 도전하는 그를 묵묵히 지지해준 고마운 분이다. 그는 “교수님도 과거에 대중적인 노래를 불러 성악의 질을 떨어뜨렸다는 이유로 국립오페라단에서 제명된 적이 있으시다”며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찾아나서는 것을 포기하지 않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씨도 그의 든든한 후원자다. 그의 데뷔 앨범에 수록된 팝페라 번안곡을 듣고 조씨는 단숨에 그를 자신의 전국 투어 공연의 협연 파트너로 발탁했다. 덕분에 그는 그동안의 무관심이란 설움에서 벗어나 실력파 신인 팝페라 가수로서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카이’란 예명 역시 조 선생님께서 선물해주셨습니다. 앞으로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려면 이름에 받침이 없어야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쉽다고 하시면서요.(웃음)”

3장,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그리고(kai) … 

지금은 그가 “하고 싶은 음악”을 마음껏 즐기면서 하고 있기에 지난날의 힘든 기억은 웃으며 추억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옛 모습처럼 외로운 길 위에서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어느 후배가 있을지 모른다. 그는 그런 후배들에게 힘이 되는 선배가 되고 싶다고 한다. 현재 성악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그는 “나처럼 정통 성악에서 벗어난 분야에 뛰어든 사람이 하나둘 생기면서 최근 음대 분위기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것 같다”며 “페이스북을 통해 전혀 모르는 음대 후배들이 진로 문제와 관련해 말을 걸어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귀띔한다. 그는 “그레고리안 성가부터 21세기 작곡가의 음악까지 성악에 관한 모든 것을 두루 섭렵하는 것이 박사과정”이라며 “성악에 대해 제대로 배운 것을 토대로 정통 클래식 외의 길을 고민하는 친구들에게 적절한 방법이나 길을 제시하거나 지도하고 싶다”고 밝힌다. 하지만 그는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 덧붙인다. “40대는 돼야 박사 과정을 마칠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요.”

 음악 후배 혹은 인생 후배에게 마지막으로 조언할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거침없이 답한다. “교수님은 여러분의 인생을 책임지지 않는다”고. 그에게 걸었던 기대가 많았기에 실망도 컸던 학교의 서늘한 눈빛을 뒤로한 채 과감한 행보를 펼친 그다운 말이다. 기자가 멈칫하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교수님은 자신이 살아오신 길을 토대로 지도해주신다”며 “거기에 길들지만 말고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인생도, 길도 너무 많은 이 세상에서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꼭 찾았으면 좋겠다”고 힘줘 말한다. 그는 이것이 “이 땅에 태어나서 해야 할 ‘의무’”라고 다시금 강조한다.

 “음악을 떠나서는 살기 어려울 것 같다”는 카이. 그의 지난 삶은 음악이 일궈왔고 또 미래에도 음악으로 차곡차곡 꾸려질 것이다. 그렇기에 ‘대중과 함께 어우러지는 즐겁고 재밌는 음악’을 만나 자신의 ‘의무’를 다하게 된 그의 지금 이 순간은 어느 때 보다도 빛나고 값지다. 클래식이든, 팝이든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대중과의 즐거운 소통을 부단히 이어갈 그의 발걸음을 응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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