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학전문대학원

일본의 정치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는 2차대전 당시 일본인들에게서 나타났던 폭력적 행태의 근본 동인을 자유롭고 성숙한 주체로서의 개인이 미처 자리매김하지 못했던 데에 있었던 것이라 역설한 바 있다. 타자를 ‘나’와 동등한 인간으로 존중할 수 있으려면, 나 자신이 먼저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는 책임감 있고 성숙한 주체가 되어야 하며 그러한 전제 없이는 타자에 대한 존중이라는 윤리적 가치의 승인 또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성숙한 주체로서의 개인들이 서로에 대한 배려와 관용,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한 관심을 현현해 나감으로써 건강한 정치공동체를 일구어 나가는 밑바탕이 될 수 있는 토양이 된다면 반대로 미성숙한 ‘개체들’의 모임은 그러하지 않을 것이라는 추론은 오히려 상식에 속한다. 후자에 있어서도 그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일종의 윤리와 같은 것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모종의 가치에 대한 무비판적 맹종이나 적나라한 자기이해(self-interest)에 대한 노골적인 계산이 비어있는 윤리의식의 공간을 대신 채워나가는 것일 수 있다. 이 또한 일종의 매개의식이기는 하다. 문제는 우리가 과연 이를 정당한 규범, 올바른 윤리로서 인정할 수 있느냐 하는 데에 있다.

 빈번히 거론되는 초·중·고교 학교폭력의 실상이나 이른바 ‘교권의 붕괴’로 표현되는 일선 학교현장의 문제 또한 우리 사회의 개인부재 현상의 또 다른 표출양태에 다름 아니다. 스스로를 존중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이에게 타인에 대한 존중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거니와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이라는 것을 오로지 자기이해의 최대한도에서의 충족으로 편협하게 오해하는 분위기 하에서 진정 자유롭고 성숙한 주체로서의 개인성이 발현되는 것, 타인에 대한 섬세한 배려와 관용이 가능해지리라는 것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러한 오해 속에서는 성숙한 개인이 아닌 이기적인 개체들만이 대량으로 양산될 수밖에는 없다. 그리고 이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 없이 행해지는 일상적 폭력의 확대·재생산, 수호되어야 할 정당한 ‘권위’와 배격되어야 마땅할 ‘권위주의’에 대한 분별없이 행해지는 경멸 가득한 공격적 태도로 이어져 나간다.

 오늘 우리가 목도하는 현상은 ‘일부 가해학생’들에 대한 처벌 강화와 같은 단기적 처방에 관한 쟁점만을 우리 앞에 제기하고 있지 않다. 이는 지속가능한 민주주의 체제를 지탱해 나갈 수 있도록 후속세대를 성숙한 시민으로 양육해 낼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데에 우리 정치공동체가 지금까지 상당한 정도에서 실패한 것은 아닌가 하는 보다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최근 서울시 교육청을 필두로 해 마련돼 온 학생인권조례 역시 현상에 대한 처방으로서는 극히 경계해야 할 것은 아닌가 한다. 권리의식 함양은 물론 좋은 것이지만 책임의식 함양 없는 권리의식 강화는 성숙한 개인성의 고양이 아닌 이기적인 개체성의 강화로 귀결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대학사회를 돌아보자. 필자 자신부터 겸허히 반성해야 함을 자인해야하겠지만 감히 묻건대, 대한민국의 최고 지성으로서 행동해야 할 우리 모두는 과연 책임의식 있는 성숙한 개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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