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여전히 세상에는 교환이 불가능한 것, 독자적인 범주로 남아있는 것들이 있다. 인식론적 측면에서 칸트는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범주’에 따라 각 개인이 물 자체를 인식한다고 주장했다. ‘뜨거운 맛’이라는 것은 없다. 뜨거움은 촉각이고, 맛은 미각이다. 박지성의 체력이 어느 한 순간에 메시의 드리블실력으로 ‘교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운동선수 한 개인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이 IQ처럼 일원화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한 개인의 덕목과 능력이라는 것 역시 하나의 가치체계로 포섭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래 인생을 살지 않았지만, 최근 사람의 내면을 볼 때, 대략 세 개의 범주들로 그 사람을 보게 되는 것 같다. 깊이. 넓이. 깨끗함 혹은 방향성. 깊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결이며, 사고와 감정의 농도이다. 인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깊이가 있다. 넓이라고 하는 것은, 사고의 폭넓음, 포용력, 현실의 욕망을 긍정할 수 있는 현실주의와도 다소간 겹치는 개념이다. 예상한 독자도 있을 수 있겠지만, 넓이는 깊이와 다소간 길항관계에 있는 듯하다. 자신의 이상에 투철한 사람일수록 넓이를 갖추기란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깨끗함. 그것은 순전함이라고 표현될 수 있을 것이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표현을 차용하자면 ‘해맑음’일 것이다. 이것은 인생의 스칼라 값이 아니라 벡터값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삶의 방향이며, 진정성이다.
자, 이제 결론. 대학생활을 어떻게 하고 싶은가? 한 학기 열심히 놀아본, 그러나 동시에 전공진입에 치이는 신입생들이여. 부탁한다. 미친 듯이 책을 읽고 보폭을 넓혀 활동해보라. 그러나, 삶의 방향성은 그 두 가지를 열심히 한다고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연애할 수 있기를. 좋은 공동체를 만나서 함께 살아가는 삶을 연습할 수 있기를. 넓이와 깊이, 방향성을 함께 갖춘 인물을 다음 대통령으로 뽑는데 당신들이 한 몫 할 수 있기를. 수출과 경제성장이라는 획일화된 가치로 일원화시키지 않는 인물이 대통령이 될 수 있기를.
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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