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 경제학의 근저에는 희소성의 원리가 있다. 자원이 부족하기에 모든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고, 따라서 선택을 해야 하고 기회비용이 생긴다. 이 기회비용을 최소화시키기 위해서는 좋은 ‘선택’을 해야 하는데, 가장 좋은 선택은 자신의 효용수준을 극대화하는 수준에서 이미 주어진 자원(혹은 재화나 서비스)을 다른 이들과 적절하게 ‘교환’하는 것이다. 소비뿐만 아니라 생산도 마찬가지이다. 주어진 ‘가격’하에서, 생산을 극대화하기 위해 생산자는 ‘자본’과 ‘노동’을 교환할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노동’만 변화시킬 수 있지만, 투자를 통해 ‘자본’역시 늘릴 수 있다. 모든 것은 교환이 가능하다. 심지어 성형수술의 가치 역시 화폐를 통해 측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교환이 가능하다는 것은 하나의 가치체계 안으로 포섭이 가능하다는 것이며, 화폐라는 척도를 통해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우의 품질을 등급 매기듯 결혼 정보 업체가 신랑과 신부를 평가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에는 교환이 불가능한 것, 독자적인 범주로 남아있는 것들이 있다. 인식론적 측면에서 칸트는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범주’에 따라 각 개인이 물 자체를 인식한다고 주장했다. ‘뜨거운 맛’이라는 것은 없다. 뜨거움은 촉각이고, 맛은 미각이다. 박지성의 체력이 어느 한 순간에 메시의 드리블실력으로 ‘교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운동선수 한 개인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이 IQ처럼 일원화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한 개인의 덕목과 능력이라는 것 역시 하나의 가치체계로 포섭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래 인생을 살지 않았지만, 최근 사람의 내면을 볼 때, 대략 세 개의 범주들로 그 사람을 보게 되는 것 같다. 깊이. 넓이. 깨끗함 혹은 방향성. 깊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결이며, 사고와 감정의 농도이다. 인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깊이가 있다. 넓이라고 하는 것은, 사고의 폭넓음, 포용력, 현실의 욕망을 긍정할 수 있는 현실주의와도 다소간 겹치는 개념이다. 예상한 독자도 있을 수 있겠지만, 넓이는 깊이와 다소간 길항관계에 있는 듯하다. 자신의 이상에 투철한 사람일수록 넓이를 갖추기란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깨끗함. 그것은 순전함이라고 표현될 수 있을 것이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표현을 차용하자면 ‘해맑음’일 것이다. 이것은 인생의 스칼라 값이 아니라 벡터값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삶의 방향이며, 진정성이다.

자, 이제 결론. 대학생활을 어떻게 하고 싶은가? 한 학기 열심히 놀아본, 그러나 동시에 전공진입에 치이는 신입생들이여. 부탁한다. 미친 듯이 책을 읽고 보폭을 넓혀 활동해보라. 그러나, 삶의 방향성은 그 두 가지를 열심히 한다고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연애할 수 있기를. 좋은 공동체를 만나서 함께 살아가는 삶을 연습할 수 있기를. 넓이와 깊이, 방향성을 함께 갖춘 인물을 다음 대통령으로 뽑는데 당신들이 한 몫 할 수 있기를. 수출과 경제성장이라는 획일화된 가치로 일원화시키지 않는 인물이 대통령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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