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이 불러온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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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학신문사
  • 승인 2012.09.02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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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관악극회 창단극「하얀 중립국」

사진: 신선혜 기자 sunhie4@snu.kr
지난달 23일부터 이달 1일(토)까지 동덕여자대학교 공연예술센터에서 관악극회(서울대 연극동문회)의 창단극 「하얀 중립국」이 무대에 올랐다. 관악극회는 서울대 연극동문회가 70년대 이후 단절됐던 '서울대연극회'의 전통을 잇고 한국 연극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자 올해 3월 창설한 극단이다. 「하얀 중립국」은 동문이며 스타 배우인 이순재가 출연한다는 점에서 ‘이순재 연극’이라고 불리며 공연 이전부터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 연극은 2차 세계대전 후 브레히트의 영향을 받아 전쟁 문제를 주로 다뤘던 스위스의 극작가 막스 프리쉬의 희곡 「안도라」를 원작으로 했다. 「안도라」는 2차 대전 당시의 유태인 학살을 은유하며 그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편견과 탄압을 다룬 작품이다. 이 희곡은 사건을 단지 이야기로만 풀어내기보다 서사극과 고전극을 융합한 형식으로 진행한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사실적인 진행으로 관객을 몰입시키는 고전극의 형식을 따르지만 관객과 사건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서사극의 특징 또한 보이고 있는 것이다. 희극 「안도라」의 극 사이사이에는 ‘중간해설자’의 역할을 하는 증언대가 등장하는데 증언대에 오른 인물들은 모두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사실과 다른 허위진술을 한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연극에 몰입돼 있던 상태에서 빠져나와 사건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인물과 제목이 각색됐을 뿐 내용과 형식에서 「안도라」를 크게 벗어나지 않은 「하얀 중립국」은 주위의 편견 속에서 좌절하는 인물 ‘시로’의 삶을 다루고 있다. ‘검은족’ 여자와 사랑에 빠져 혼혈아 시로를 낳은 그의 아버지는 외국인 아이를 낳았다고 지탄받을까 두려워 ‘노란족’ 아이를 주워왔다고 거짓말을 한다. 성장하면서 노란족이라는 이유로 박해받는 시로는 자신이 노란족이라고 생각해 여동생 ‘아미’와 사랑에 빠지기까지 한다. 시로의 박해소식을 들은 검은족 엄마가 찾아오지만 돌에 맞아 살해당하고 만다. 노란족이라는 이유로 엄마의 살해범으로 오인 받으며 시로의 삶은 점차 황폐해져 간다.

 시로의 삶을 파탄의 지경에까지 몰고 가는 것은 고작 사람들이 지닌 ‘편견’에 불과하다. ‘깨끗하고 정의로운’ 하얀족 사람들은 ‘재주 많고 영악해 좋은 자리는 다 차지한’ 노란족을 경멸한다. 등장인물 중 하나인 '하사'는 시로에게 끊임없이 겁쟁이라고 해대며 노골적으로 그의 약혼자 아미를 탐내고, 스승인 '목수’는 그가 노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실력을 무시하며 목공일을 하지 못하게 한다. 극 중에서 몰려다니며 따돌림을 주도하는 시로의 친구, 주치의, 스승 등 4명의 인물은 시로에게 겉으로는 친절한 척하지만 시로와 대립하게 되자 노란족을 박해하는 본색을 드러낸다. 이러한 부당한 대우 속에서 시로는 점점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스스로의 인간성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한다. 결국 시로는 자신을 포기해버리고 사랑했던 아미를 강간하려고까지 한다.

 이처럼 「하얀 중립국」은 유태인 학살을 다뤘던「안도라」가 견지했던 '편견과 그로 인한 인간 소외'라는 문제의식을 현재 시점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이 연극을 보는 관객들은 우리 사회 속에서 소외되고 있는 소수자들의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홀로 무대에 서 있는 시로의 모습에 청소년의 왕따 문제부터 이주노동자 문제까지 한국 사회 곳곳의 소외되고 있는 인간 군상들이 투영돼 있기 때문이다. 한편 하얀족 주민들은 무대의 가장 높은 곳에 설치된 증언대 위에서 끊임없이 "나는 책임이 없다"고 말한다. 시로를 소외의 자리로 내몬 장본인들이 자신들의 태도가 불러온 결과와 그에 따른 책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현대사회의 어두운 단면과 닮아있어 씁쓸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하얀 중립국」은 시로가 노란족이라는 이유로 검은 나라 군대에 끌려가 죽고, 아버지는 자살, 아미는 실성해버린다는 완벽한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탄압받고 학대당하던 소수자들은 끊임없는 절망 속에서 죽거나 미쳐버리는데, 그들을 박해하던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낄낄거리며 일상으로 돌아간다. 극의 마지막, 아미는 순결과 깨끗함을 상징하는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채로 ‘하얀 나라가 더러워졌다’고 읊조린다. 무대 위에 남겨진 시로의 구두만이 모순적인 현실 속 소외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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