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들어 우리의 소비문화에 새로운 개념이 등장했다. ‘착한 소비’라는 이름을 달고 말이다. 동물실험을 거치지 않은 화장품을 사용하는 것, 쉽게 분해되는 친환경 세제를 구입하는 것, 잔인하게 생산된 모피를 걸치지 않는 것, 가죽가방 대신에 천으로 만든 가방을 드는 것, 공장제 축산업을 피해 채식을 지향하는 것, 공정무역 커피와 초콜릿을 먹는 것 등 - 몇 년 전만 해도 괜히 유난스러워 보였던 이런 행동들이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것이 되었다. 싼 가격이나 편리함에 앞서 환경과 사회를 고려하는 태도가 확산되는 것은 물론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이 선택들에 ‘착하다’는 수식어가 붙는 것도 과연 그러할까?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의 진열대에 놓인 수많은 상품들은 소비자들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해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들이 어디에서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사람들의 손을 거쳐 여기까지 와서 이만한 가격이 붙었는지에 대한 정보는 소비자들에게 쉽게 제공되지 못한다. 깔끔하게 포장된 상품들의 뒷면에서 부조리한 노동이나 환경파괴가 발생해도 최종 소비자는 그것을 알 수도 거기에 간섭할 수도 없다는 것이 지금의 소비 시스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굳이 까다로운 소비를 선택하는 것은, 거대 자본이 미리 설정해 놓은 생산과 소비의 그물망에 수동적으로 포섭되지 않겠다는 일종의 저항인 셈이다.

그러나 여기에 ‘착한 소비’라는 이름이 붙으면서 약간 이상한 일이 생겨나는 것 같다. 착한 일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해 준다. 착한 일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렇게 안전한 이름이기에 ‘착한 소비’는 기존의 시스템에 그만큼 쉽게 흡수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가령 채식파티를 위해 유기농 딸기를 수확하는 연예인들의 ‘착한 소풍’은 케이블 채널에서 스타일리시하게 방영될 수 있었지만 예쁜 딸기밭이 있던 양평 두물머리의 농민들이 그 즈음 현 정부의 4대강 사업으로 자신들이 일군 농토를 떠나야 했던 상황은 방송에 노출될 수 없었다. 공정무역 원두를 판매하는 ‘착한 카페’를 이용하면 커피농장 노동자들을 착취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선진국형 기호식품의 대량 생산이 기반하고 있는 종속적인 플랜테이션과 환경파괴는 어차피 계속될 것이라는 점은 ‘착함’의 담론 속에서 좀처럼 지적되지 않는다.

불편하고 피곤한 저항이 착하게 변하는 과정에서는 이처럼 특정한 정보들, 즉 기업들을 실제로 위협할 수 있는 정보들이 걸러지게 된다. 상품으로 만들 수 있고 트렌드화할 수 있는 ‘착함’을 소비하는 것까지는 권장되지만 소비 원칙을 바꿈으로써 그 배면의 시스템까지 비판하는 일은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이 지면에서 모두가 래디컬리스트가 돼야 한다거나 근본적인 저항이 아니면 결국 포즈에 불과한 허위의식이라는 냉소를 내비치려는 것은 아니다. 일상적인 생활 속의 사소해 보이고 작아 보이는 것들이 변할 때에야 비로소 사회도 실제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 변화 속의 저항성이 착함 속에 희석될 때에, 나의 작은 변화로써 세상도 변할 거라는 기대는 결국 또 한 걸음 멀어지는 듯하다. ‘착한 소비’가 점차 트렌드 속으로 들어가는 지금, 정말 필요한 것은 재차 또 재차 ‘의심하는 소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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