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어느 봄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한 구내식당에서는 은빛 머리칼을 단정하게 빗어 넘긴 초로의 한 신사가 자신의 나이의 절반에 불과한 30대 초반의 젊은이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뿔테안경에 가려지긴 했으나 예리한 눈빛의 소유자였던 노교수는 낮은 어조로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고 왜소하지만 침착하고 사려 깊은 외모를 지닌 신진학자는 간혹 가벼운 미소를 띠면서도 시종일관 진지하게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훗날 케임브리지 대화로 불리게 되는 이 자리의 두 주인공은 다름 아닌 소련사 연구의 대가이자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인 E. H. 카와, 1982년 카가 사망한 뒤 그를 이어 영국의 소련사학계를 주도하게 될 로버트 데이비스였다. 두 사람은 서방의 소련사 연구에 있어 불멸의 금자탑으로 일컬어지는 카의 저작 『소비에트 러시아사』의 1926-29년 경제 분야에 관한 공동 집필 작업을 논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는 생전에 민족주의 연구자이자 국제정치학자로서 그리고 20세기의 대표적인 역사이론가로서 매우 다채로운 면모를 선보인 지식인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오늘날 영미권의 주도적인 소련사 연구자들이 이어받고 있는 탈냉전적 시각과 경험주의적 연구기법의 전통을 최초로 수립한 역사가였다. 그가 30여년이라는 오랜 세월의 집필기간을 거쳐 14권으로 완성한 『소비에트 러시아사』는 지나친 개인주의로 사회가 해체될 위기에 처한 19세기 유럽 부르주아 체제의 대안으로서 20세기 소련을 바라보는 독특한 문제의식의 소산이었고 따라서 냉전시기의 국제적 분위기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이른바 내재적 관점을 채택한 역작이었다. 카는 방대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엄격한 사료비판 작업을 통해 소련체제의 수립과 이후 발전과정을 정확하고도 치밀하게 실증해 보임으로써 당시 보수 일변도의 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줌과 동시에 향후 소련체제에 대한 냉전적 시각을 고수하는 전체주의 학파를 무너뜨리며 1980년대부터 국제학계의 소련사 연구를 주도하게 될 수정주의 학파의 탄생에 산파역을 담당했다.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역사한 무엇인가』는 바로 그와 같은 『소비에트 러시아사』의 저술 과정에서 생겨난 역사 일반에 관한 문제의식이 반영된 저작이었다. 사실 독자들은 이 책을 단순히 역사인식과 방법론에 관련된 이론적 성찰로만 알고 있으나 그 이면에는 냉전시대에 소련의 역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카 스스로 겪어야 했던 이데올로기적 갈등과 보수적인 학계의 비판을 견뎌낼 수 있는 객관적 실증의 문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역사가가 자신의 시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와 같은 고민들이 숨겨져 있었다. 즉 카는 역사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시대를 넘어서려는 한 지식인의 인식론적 그리고 존재론적 노력을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금년은 카가 사망한지 꼭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과거 그의 절친한 동료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이란 명저의 저자인 앨런 테일러는 카를 “역사가들 가운데 범위와 정신에 있어 괴테에 비견될 수 있는 올림푸스의 신과 같은 학자”라 부르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시대를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지성으로 현실로서의 역사와 학문으로서의 역사 사이를 가로지르는 긴장의 끈을 평생 놓지 않았던 카의 지적 편력은 소련의 몰락과 그의 역사인식론을 비판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의 거센 도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역사를 연구하는 우리에게 여전히 커다란 울림을 안겨주고 있다. 과연 역사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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