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공존하는 비동시적 사고들
현재 곳곳에서 드러나
구시대적 사고 탈피해
갈등의 평행 속 접점 찾아야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현재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늘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하여 외형적으로만 동일한 현재에 존재할 뿐이다."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가 보기에 사회적 갈등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가 본 1930년대 독일사회는 전근대성과 근대성, 탈근대성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균열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시대에 존재하는 사회적 요소들이 같은 시대에 공존하는 현상을 블로흐는 ‘비동시성의 동시성(The Contemporaneity of the Uncontemporary)’이라는 형용모순으로 설명했다.

이 개념은 ‘한국인에게 두 개의 시계가 있다’는 말로 변형돼 유행하기도 했다. 한국인들은 어떤 때는 왕조의 시계에 맞춰 행동하고 다른 때는 현대의 시계에 맞춰 행동한다는 것이다. 세계 최고의 기업 중 하나인 삼성전자가 전근대적 세습을 통해 경영권을 유지하는 아이러니가 대표적인 예다. 시가총액이 200조가 넘고 임직원만 20만명 수준이라는 삼성그룹이 한 가문의 사유재산처럼 상속되는 부조리를 표현한 말 치고는 꽤나 ‘문학적’이다.

이제 여기에 ‘한국에는 두 개의 판결이 공존한다’는 말을 추가해도 좋을 것 같다. 인혁당 사건 피해자에게 사과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라며 역사에 맡기자던 박근혜 후보의 말을 따르자면 말이다. 32년 만에 바로잡은 최종 판결을 최악의 사법 살인과 동일선에 놓는 법치 인식도 놀라웠지만, 아직 유신시절에 머물러 있는 듯한 박 후보가 민주화 이후에 태어난 필자와 동시대인임을 인식하는 것도 새삼스러웠다. 근현대사 교과서에서나 접할 법한 구시대적 사고가 2012년 대선 후보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사형선고 18시간 만에 8명 전원 사형 집행’으로 유명한 2차 인혁당 사건이 유신의 어두운 면에 속한다는 역사적 상식(common sense)은 실은 그렇게 공통적(common)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교과서에서만 봤던 일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기시감은 몇 해 전에도 있었다. ‘낙원구 행복동’에 위치한 빈민가의 작은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조세희의 난쟁이와 겹쳐보였던 망루 위의 작은 사람들. 마이크를 잡고 생중계를 하던 여자 앵커가 어떡하냐고, 망루가 불타고 있다고, 그 안에 사람이 있다고 울먹이던 바로 그 용산참사 말이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불타고 있던 망루를 보면서 많은 이들은 지금이 2천년대인지 70년대인지, 현실인지 소설 속인지 되물어야 했다. 불타는 망루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쏘아올린 작은 공은 한국사회의 비동시대성에 대한 가없는 분노의 상징이 됐다.

용산참사를 둘러싼 진실공방을 다룬 한 다큐멘터리에는 남일당 건물의 두 문을 가리키는 「두 개의 문」이라는 제목이 달렸다. 경찰이 두 개의 문 중 어느 쪽이 망루로 올라가는 문인지도 모른 채 성급하게 작전에 임했음을 지적하는 의미라고 한다. 그런데 두 개의 문은 어쩌면 공간이 아니라 시간의 문일지도 모르겠다. 영문도 모르게 나날이 치솟는다는 국격과 아직도 시대를 지배하는 개발독재적 발상 사이의 시간차를 벌리고 있는.

두 개의 시계, 두 개의 판결, 그리고 「두 개의 문」까지 한국사회엔 동시대의 산물이라기엔 너무나 이질적인 시간대가 평행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다. 법에 구애받지 않은 채 마음껏 기업하고, 불순분자를 손쉽게 처리하고, 투기를 위해 빈민가를 밀어버릴 수 있던 ‘호시절’은 이제 다시 오지 않는다. 이 단순한 명제에 합의하지 못한다면, 동시대를 사는 우리 ‘비동시대인’들은 화해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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