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연재] 시인의 서재 ② 김소연 시인

시인들의 책꽂이에는 어떤 책이 꽂혀있을까. 작품을 써내는 이들은 어떤 작품에 울고 웃었을까. 『대학신문』은 문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여러 연령대의 시인 4명의 서재를 살짝 들여다본다. 서재에 꽂힌 작품을 통해 독자로서의 그들의 모습을 만나보자.

연재순서
①함민복 시인 ②김소연 시인 ③이이체 시인 ④신해욱 시인



나이 서른이 되면 인생에 대한 불안은 끝날 줄 알았다. 어떤 식으로든 독립적이어지고 당장은 아니어도 저 멀리서 성공의 불빛이 희미하게 반짝여줄 것 같았다. 막상 서른이 되고 보니 나는 여전히 불안했고 여전히 암담했다. 나이 마흔이면 의젓한 어른이 되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책임감을 지닌 사람이 될 줄 알았다. 세상 모든 굴곡들로부터 바위처럼 호연해질 것 같았지만 막상 그렇지가 않았다. 더 큰 가난과 더 큰 초조가 있을 뿐이었다. 이 낙담과 처참은 요즘 친구들과 자주 나누는 대화 중 하나가 됐다.

주위를 둘러봐도 그렇다. 요즘의 마흔 살은 옛날의 서른 살 같고, 서른 살들은 옛날의 스무 살 같다는 말을 곧잘 듣곤 한다. 내가 느끼기도 그렇다. 도무지 요즘 서른 살들은 내 스무 살 때만큼도 의젓해보이질 않는다. 나 어릴 때 목격했던 마흔 살 어른들과 비교했을 때에도 나는 너무 작고 초라한 아이 같기만 하다. 도대체 언제쯤에야 제대로 철이 들까. 주위를 둘러보면 마흔 살도 쉰 살도 예순 살도, 어른 같지가 않다. 이 '철들지 않음/ 못함'을 어떻게든 이해해볼 수는 없을까.

이것을 '미성년'이 아니라, ‘비성년’이라고 명명하는 한 시인의 에세이가 있다. 신해욱 시인의 『비성년열전』은 ‘철들기를 거부한 자들/철들 수 없는 자들’의 다양한 양태들, 거부를 선택한 숙명들, 숙명의 비의들을 차근차근 밝혀낸다. 만화와 소설과 영화에서 그 캐릭터들을 골라오기도 하고, 실존인물 중에서 찾아내기도 한다. 이를테면, 프란츠 카프카는 왜 사랑하는 여인에게 청혼을 했다가 그것을 번복하고 왜 다시 청혼을 하며 변덕과 무책임을 반복했는가. 카프카를 순진하게 변덕쟁이라고 부르지 않고 좀더 순수하게 부를 수 있다면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로베르트 발저의 소설 「이민자들」에서 암브로스 아델바르트는 어째서 하인의 삶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에 하인의 삶을 고집하게 되었는가. 상식의 피상성 말고 진실의 속살로 살펴본다면 거기엔 어떤 묵직한 이유들이 있는가.

우리는 책 속에서 위로를 찾길 바라곤 한다. 어떤 위로는 달콤하고 손쉽지만 여전히 상투적이고 어떤 위로는 깊고 그윽하지만 여전히 추상적이기만 하다. 진짜 위로는 대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불편해서 일차적으로 거부감부터 생긴다. 그래서 진짜 좋은 책은, 많은 사람에게 읽힌다기보다는 불편을 시련처럼 견뎌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읽힌다. 그래서 어느 한 책은 특별한 사람에게서 더 특별한 친구가 된다.

당신이 만약 특별한 친구를 찾는다면, 시인의 섬세한 손길과 시적인 문장을 찾는다면, 나지막하지만 꼼꼼하고 지적이지만 감수성으로 소통하는 100%의 위로를 찾는 자라면 『비성년열전』을 만나보라 권하고 싶다. 때 묻지 않은 나라의 때 묻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여행길처럼, 약간의 낯섦을 통과하고 나면 만날 수가 있다. 나와 너무 닮아 불쌍하고 어리석고 아프고 괴롭고 힘든 한 영혼의 쨍한 햇살을. 그 철없는 어른을. 당신의 어느 구석과 너무도 닮아 외면하고 싶겠지만 결국엔 손을 꼭 잡아주어야 할 비성년들이 이 책에는 빼곡하다. 당신에게 상처를 남긴 채 떠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진행형으로 기승을 부리곤 하는, 당신이 사랑했던 그 사람들, 그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들도 이 책에는 빼곡하다.

나는 왜 이렇게 철들지 못했는가. 당신은 왜 그렇게 미숙하고 거칠게 나를 대했는가. 이 모든 나의 이상함과 타인의 이상함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걸 나는 '어른됨'이라고 생각한다. 어렵지만 그 이해라는 것, 얼마나 해보고 싶은가. 이 책은 타인에 대한 이해를 애타게 갈구하는 마음들로 가득하다.

우리의 소망은 비슷비슷하고 소박해져가는데 우리의 삶은 왜 이다지 점점 더 불투명해가는가. 우리의 삶은 어째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상처를 수집가처럼 주워 모으는가. 매사에 나는 진실했을 뿐인데, 내 삶은 왜 이렇게 남루해지는가. 도대체 왜 그런가. 쉬운 위로가 아니라 위로의 역방향으로 다가오는 꼼꼼하고 괴이한 진짜 위로를 나는 이 책에서 만났다. 사실 이 책은 너무 순수하고 귀한 친구 같아서 아무에게나 알려주고 싶진 않다. 나 혼자 독차지한 채로 비밀로 간직하고 싶다. 너무 많은 것을 견뎌서 특별해진 자가 자신의 특별함을 비루한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을까봐, 그게 안타까워서, 비상식량을 나누듯 이 책을, 아깝지만 건넨다.



김소연 시인


경북 경주 출생. 1993년 계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와 산문집 『마음사전』을 출간. 노작문학상, 현대문학상 수상.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