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가 1712년생이니 올해는 탄생 300년이 된다. 프랑스, 스위스, 영국에서는 그가 체류했던 곳마다 축제를 열었으며, 세계적으로 그를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벌어졌고 우리나라에서도 몇 개 학회가 그를 위한 특별학술모임을 조직했다. 18세기의 인물인 그가 21세기에도 여전히 대규모로 ‘소비’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특히 우리와 아무런 직접적 연관이 없는 그를 우리는 왜 기억하는 것일까? 이는 그가 우리의 삶의 구조와 그것이 제기하는 일련의 문제들에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는 우리와 역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와 우리 사이에는 3세기의 시차가 있지만, 이 3세기의 역사적 변화는 참으로 심원했다. 그 앞부분에는 무엇보다도 18세기 말-19세기 초의 미국혁명, 프랑스혁명, 영국의 산업혁명이 있었고, 그 뒷부분에는 ‘동구혁명’과 소련의 해체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2세기에 걸치는 ‘진정한 근대’ 저쪽 너머의 ‘구체제’의 인물이고, 우리는 이쪽 너머의 ‘탈근대’에 속한다. 도대체 그의 사상의 내공이 얼마나 깊기에 그는 이 심원한 변화를 넘어 여전히 호소력을 갖고 있는 것일까? 이는 그가 ‘진정한 근대’의 사상적 연원인 계몽사상의 흐름 속에서 ‘근대성’의 획득이 심각한 상실을 수반한다는 점을 예리하게 간파하는 천재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가 ‘근대성’의 일부를 이루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탈근대적 개방성’을 지닌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루소는 정식교육을 받지 않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독학으로 일가를 이룬 드문 인물이다. 아마 1급의 사상가로선 출신이 가장 하층에 속할 것이다. 더욱이 아무리 분과학문체제가 본격화되기 이전 세대라고 해도 그의 사정권은 참으로 다양했다: 소설, 시, 오페라, 희극, 작곡, 자서전, 극장론, 언어론, 음악론, 교육론, 고백록, 서한집, 철학, 정치학, 정치경제학, 식물학, 심지어 화학 등. 당대의 집단기억 속에서 그는 근대적 감수성을 갖춘 고독하고 우울한 산책자인 동시에 ‘사회계약론’의 저자로서 오만한 공화주의자라는 이중적 존재였다. 고로 그는 ‘근대성’의 형성과 관련하여 이중의 단절 내지 혁명을 구현한다. 하나는 ‘자코뱅 혁명’의 화신으로서 절대군주제와의 정치적 단절이고 다른 하나는 낭만적 감수성의 예언자로서 자존심과 문명화의 부자연스런 요청에 대한 실존적 단절이다.

오늘날 루소는 주로 ‘근대성’의 초극을 가능케 하는 계기의 한 주요한 원류로서 조명을 받는다. 최근 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은 주로 급진(deep)생태론, 진보교육론, 여성주의, 인종주의, 그리고 특히 ‘더 많은 민주주의’ 등의 주제를 둘러싸고 제기된다. 이럴 경우에 흔히 그는 그러한 새로운 문제제기를 ‘최초로’ 시도한 인물로 부각된다. 그러니까 그는 탈근대의 문제의식이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최상류의 포락선 역할을 한다. 물론 이는 회고적 관점이다. 루소가 근대 너머의 세계를 이미 18세기에 예상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그의 천재성을 너무 부풀린 결과이다. 그는 자신의 출신, 성장과정, 감수성 등을 통해 주류 계몽사상가들이 놓쳤던 측면들을 보고 이를 유려한 문체로 그려냈으며, 그리하여 스스로 ‘부르주아 근대’의 한 원조이면서도 동시에 일정한 비판자가 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현실을 끊임없이 불편하게 만드는 전복자요, 불온한 존재이다. 우리가 그를 여전히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혁명의 가능성은커녕 그 역사성마저 부정되고 있는 21세기 벽두의 암울한 ‘멋진 신세계’에서 루소는 언제나 우리를 일깨우는 등에와 같은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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