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시간을 기억하는 공간 ①

서울대에는 제각기 학교의 ‘명물’이라 불리는 공간들이 존재한다. 이 공간 안에는 제각기 다른 이야기들이 잠들어 있다. 『대학신문』은 총 4회에 걸쳐 각 공간에 담긴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나눠보고자 한다.
 

연재순서
① 서울대 정문
② 본부 앞 잔디
③ 아크로
④ 자하연

어느새 부터인가 서울대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샤’대문. 30년 넘게 관악의 수문장 역할을 해왔던 ‘샤’대문은 대학 진학을 앞둔 수험생들에게는 꼭 달성하고 싶은 고지로, 또 공권력에 대한 항의와 시위가 벌어졌던 성토와 발언의 장으로 대외적인 서울대의 '얼굴'을 상징해왔다.

'샤'대문이 생겨나기까지


서울대가 관악으로 이전하기 전에 위치했던 동숭동캠퍼스의 정문은 여느 중·고등학교의 교문과 다름없었다. 1975년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게 되자 정문의 필요성과 디자인에 관한 논의가 제기됐다.

학교 측은 학내의견을 종합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1977년 4월 3가지 도안을 내 학생들의 여론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같은 해 7월, 학교 측은 세 안 모두 긍정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모든 도안을 폐기하고 학교의 정장(正章)을 본 딴 현재의 교문 도안을 확정해 공표했다. 이를 두고 당시 법대 재학생 한모군이 “학생 여론을 존중하지 않고 단지 여론 조사를 구색맞추기 용도로 사용하는 당국의 자세는 비민주적이며 반드시 지양돼야 한다”고 항의하는 등 여러 학생의 문제제기가 이어졌지만 결국 같은 해 12월 학교는 정문착공에 돌입했다.

3개월 후 황토색의 정문이 위풍당당하게 자태를 드러낸다. ‘국립 서울 대학교’의 머리글자인 ‘ㄱ’, ‘ㅅ’, ‘ㄷ’의 형상을 본뜬 정문은 전체적으로 열쇠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서울대의 교훈인 ‘진리는 나의 빛(VERITAS LUX MEA)’의 ‘진리’를 찾기 위한 열쇠라는 의미를 담은 외양이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철조 구조물에 당시 교수진과 학생들의 의견은 분분하게 나뉘었다. 인문대의 한 교수는 “교문이 기발한 면만 강조돼 전체적으로 천박한 느낌을 풍긴다”고 주장했고 학교 측에서는 “독창적이고 참신한 맛이 나며 개방적인 이미지를 살린 것”이라 반박하기도 했다. 이처럼 정문이 서울대의 얼굴로 자리잡기까지는 다양한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2006년에는 개교 60주년을 기념해 정문의 색채를 기존의 황토색에서 지금의 은색으로 바꾸고 조명을 설치했다. 정문의 옷 갈아입기에 앞장섰던 백명진 교수(디자인학부)는 “기존의 색보다 밝은 은회색으로 바꾸며 열린 교육 공간의 느낌을 살리고, 밤새 점등되는 조명을 설치해 ‘24시간 깨어있는 학문의 전당’이라는 서울대의 이미지를 구현하려 했다”고 회상했다. 현재 정문의 조명은 에너지 낭비 방지를 위해 꺼져있는 상태다.

최루탄 연기 자욱하던 시위의 장

정문은 본부 앞 아크로폴리스와 더불어 학생들의 대표적인 시위의 공간이기도 했다. 1976년 가을 축제기간에는 감골마당(현재 규장각 터)에서 가곡 「선구자」를 합창하고 독재타도·유신철폐를 외치며 정문까지 전진한 ‘서울대 축제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곧바로 출동한 경찰에 의해 해산됐으나 이후 정문은 부조리에 항거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시위의 장이 됐다. 독재 정치에 맞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위가 이어지던 1970년대와 80년대, 정문 앞 풍경은 불심검문과 경찰들과 학생들의 대치, 부상당해 후송되는 학생들로 채워져 있었다.

1990년대에 이르자 시위는 대폭 줄어들었지만 사회적 사안에 반기를 든 학생들에 의해 간간이 정문 앞이 북적거리기도 했다. 1998년 11월 23일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은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방한에 반대해 정문에 반미현수막을 걸고 학생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는 등 시위 활동을 벌였다. ‘IMF 재협상 실시’와 ‘미국의 경제침략 중단’ 등을 요구하며 경찰들과 첨예하게 대치해 부상당하는 학생들이 속출하기도 했다.

1999년에는 지하철노조가 정리해고를 반대하며 정문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 이에 경찰 68개 중대 8천여 명이 다연발 최루탄 발사차량과 굴삭기를 이용해 서울대 정문과 후문의 바리케이트를 뚫고 학내에 진입해 시위를 진압했다.

작년 9월에는 서울대학교 법인화에 반대한 1인 시위가 정문 꼭대기에서 벌어졌다(『대학신문』 2011년 9월 25일자). 현 학생회장인 오준규씨(법대·08)가 정문 위에 올라가 ‘서울대학교 법인화법 폐기’를 주장하며 고공농성을 벌인 것이다. 이틀에 걸친 농성 동안 학내의 차량 출입이 통제됐고 이후 정문의 사다리는 철판으로 덮여 올라갈 수 없게 됐다.

다른 대학에서 찾아보기 힘든 타워형의 정문은 사회에서 때로는 ‘상아탑’과 ‘학벌’의 상징으로, 때로는 ‘부조리에 맞서는 시대 의식’으로 자리하며 서울대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굳어졌다. 백 교수는 “교문 자체가 학교의 상징이 되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흔치 않다”고 말했다. 현재의 서울대 정문은 입학을 꿈꾸며 견학오는 중·고등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포토존이며 학교를 떠나는 졸업생들이 서울대에서의 마지막 발자취를 사진으로 남기는 공간이기도 하다. 관악산과 조화를 이루는 관악캠퍼스의 랜드마크 ‘샤’대문에서 우리의 오늘을 담아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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