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마당을 나온 암탉」, 「돼지의 왕」 등이 이례적으로 이목을 끌며 한국의 장편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특히 「돼지의 왕」은 국내 장편 애니메이션 중 최초로 칸 영화제에 초청되며 높아진 우리 애니메이션의 위상을 보여줬다. 오랜 침체기를 겪은 한국 애니메이션계로서는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다. 『대학신문』에서는 한국의 애니메이션이 걸어온 길과 장편 애니메이션이 최근에 조명받게 된 이유를 진단하고 앞으로 장편 애니메이션이 나아갈 방향을 고민해봤다.


15년간의 성장통, 한 뼘 자란 장편 애니메이션


한동안 고군분투하던 스크린에서 희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마당을 나온 암탉」(2011)은 국내 장편 애니메이션사상 최초로 관객 220만명을 돌파하며 흥행기록을 경신했고, 「돼지의 왕」(2011)은 장편 애니메이션 최초로 칸 영화제에 초청됐다. 장편 애니메이션이 본격적으로 창작 산업에 참여한지 15년밖에 되지 않은 것을 고려한다면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나라 애니메이션계는 80년대까지만 해도 애니메이션 강국인 일본과 미국의 하청작업을 도맡아왔다. 이 시기는 제작과정에서 많은 노동력과 시간을 요하는 작화작업을 대행하며 애니메이션 제작기술을 익힐 수 있는 기회였다. 애니메이션 창작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직접 애니메이션을 창작하는 것보다 OEM에 주력해 당장의 수익을 거두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한국 애니메이션계는 ‘타의’에 의해 작품을 본격적으로 제작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일본과 미국의 하청이 인건비가 더 저렴한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대거 옮겨가면서 제작인력을 애니메이션 창작 쪽으로 돌려야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립할 준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제작된 장편 애니메이션은 허술한 이야기 구조에 대한 비판과 표절시비에 둘러싸인 채 극장에서 금세 자취를 감췄다.

이러한 대중의 무관심 속에서도 애니메이션계는 「마리 이야기」(2002), 「원더풀 데이즈」(2003), 「천년여우 여우비」(2006) 등의 장편 애니메이션을 창작하며 명맥을 이어갔다. 「마리 이야기」와 「오세암」(2003)은 각각 5만명, 14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것에 그쳐 흥행에는 실패했으나, 애니메이션계의 ‘칸’이라 불리는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Annecy International Animated Film Festival)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또한 「원더풀 데이즈」는 셀 애니메이션, CGI, 실사 미니어처를 합성하며 완성도 높은 영상미를 구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관객들의 충분한 신뢰를 확보하지 못해 7년의 시간과 126억원의 예산이 투자됐음에도 불과 22만명의 관객만이 「원더풀 데이즈」를 관람하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 모처럼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듯했던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은 배급사들이 투자를 꺼리게 돼 다시금 침체기에 들어서게 됐다.

하지만 최근 스크린을 찾은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들은 확연히 달라진 위상을 드러내고 있다. 2011년 개봉한 「마당을 나온 암탉」은 30억원의 제작비로 22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애니메이션 흥행의 신호탄을 쏴 올렸으며, 「돼지의 왕」은 탄탄한 플롯을 바탕으로 1억2천만원이란 저예산을 들여 2만명의 관객동원에 성공했다. 일각에서는 한동안 침체됐던 애니메이션계가 드디어 활로를 찾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박세영 교수(부천대 만화·영상그래픽 전공)는 “창작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장편 애니메이션이 이 정도 성장을 이룬 것은 놀라운 일”이라며 “이러한 성공의 이면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재기를 노린 애니메이션계의 노력이 숨어있다”고 말했다.


장편 애니메이션에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침체기를 겪는 동안 애니메이션계는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자구책을 찾아나섰다. 한국 애니메이션계는 소재와 장르, 기법에 대한 실험을 꾸준히 진행하는 동시에 장편 애니메이션이 처한 현실을 극복하는 데 적합한 제작방식을 모색해 나갔다. 이러한 노력은 우리의 장편 애니메이션이 한 발 나아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됐다.

과연 '어린이의 전유물'인가?

장편 애니메이션의 제작이 탄력을 얻은 데에는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담아 성인들의 관심을 끈 것이 한몫했다. 심도있는 주제를 다룬 장편 애니메이션이 속속들이 개봉하면서 관객들이 애니메이션을 어린이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령층이 폭넓게 즐길 수 있는 장르라고 인식하게 됐기 때문이다.

친근한 표정의 물고기 캐릭터와 뮤지컬적인 요소가 어우러져 아이들과도 함께 즐길 수 있는 「파닥파닥」(2012)은 횟집 수족관에 갓 잡혀온 고등어 파닥파닥과 수족관의 대장 올드넙치의 갈등을 보여줌으로써 계급사회 내부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돼지의 왕」은 우리나라 청소년사회를 배경으로 그들 내부에 자리잡은 피라미드형 권력구조의 잔혹함을 신랄하게 묘사했다는 평을 받는다. 박세영 교수는 “무겁고 어려운 주제를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애니메이션 장르적 특성이 잔혹한 현실을 오히려 노골적으로 고발하기 쉽다”고 말했다.

지난 3월 청소년관람불가로 개봉한「은실이」(2012)는 자칫 민감할 수 있는 장애여성의 성문제라는 소재를 매끄럽게 풀어나가며 가해자와 방관자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문화평론가 이택광 교수(경희대 글로벌 커뮤니케이션학부)는 “성인을 대상으로 한 애니메이션의 심도있는 서사구조가 주목받는 것은 정치·사회적 관심도가 높아진 대중의 수요를 보여주는 지표”라고 말했다.

이처럼 우리사회의 부조리함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할 기회를 제공하는 장편 애니메이션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개봉될 예정이다. 88만원 세대의 희망없는 삶을 다룬 장형윤 감독의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와 인간의 양면성을 파헤치는 연상호 감독의 「사이비」가 내년 중에 개봉할 예정이다.

기법으로 감싸안는 한국적 정서

대중들이 장편 애니메이션에 눈길을 돌리게 된 데는 표현기법의 쇄신을 통해 한국인 특유의 정서를 표현해냈다는 점도 작용했다.

그동안 국내 애니메이션계에는 한국적인 풍경이나 한국인의 표정, 외형에 대한 화풍이 정립돼 있지 않아 새내기 애니메이터들이 인물을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파닥파닥」의 이대희 감독은 “일본과 미국의 하청수주가 활발했던 당시 애니메이터들은 일본과 미국에서 발주한 표정과 외형을 작화작업에 반영했다”며 “그 이후에도 디즈니나 지브리 캐릭터의 이국적인 외형을 따라 그리며 연습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장편 애니메이션을 창작하기 시작하자 애니메이션의 한국적 화풍을 정립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파닥파닥」의 제작진은 드라마 클로즈업 숏을 세밀히 관찰해 다양한 연령층의 배우들이 짓는 표정을 분석하는 작업을 거쳤다. 물고기들의 표정에 한국인들이 짓는 표정과 그 표정이 불러오는 정서를 100% 전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대희 감독은 “물고기는 인간처럼 사지가 없기 때문에 표정은 감정을 전달하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며 “「파닥파닥」은 3D 애니메이션이었기에 표정 변화 하나에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지만 덕분에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정서를 제대로 구현한 것 같다”고 말했다.

과거 한국의 시대적 풍경을 사실적으로 고증해 관객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애니메이션도 있다. 10만장의 원화를 수작업으로 일일이 채색한 「소중한 날의 꿈」은 1970년대 말의 사회상을 의상, 소품, 음반 커버와 같은 세부적 요소까지 사실적으로 복원·고증해 묘사했다. 이택광 교수는 “「소중한 날의 꿈」은 우리의 평범했던 시절을 최초로 이야기한 장편 애니메이션”이라며 “과거를 충실히 재현한 장면을 통해 산업화 이전의 순수했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녹여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현실적인 제작방식에 발맞추기

자본수급이 어려운 현실에 알맞게 제작방식의 변화를 모색한 것도 국내 애니메이션이 주목받는 중요한 요인이 됐다. 현재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은 인력난, 재정난 등 스튜디오가 처한 상황에 적합한 제작방식을 도입해 애니메이션의 다양화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컴퓨터의 보급과 함께 애니메이션 제작공정에 디지털 방식이 도입되면서 소규모 제작사들은 ‘애니모’, ‘마야’ 등의 2D, 3D 애니메이션 제작프로그램을 사용해 비용의 부담을 덜 수 있었다. 「마리 이야기」는 디지털 개인 작업 방식을 차용해 소규모 인원으로 시간과 비용을 절감한 작품이다. 한창완 교수(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는 “적은 자본으로 실험정신을 담아낼 수 있는 다양한 장르를 개발한다면 소규모 제작사들도 얼마든지 양질의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시나리오와 캐릭터를 미리 준비하는 프리프로덕션 방식을 도입해 실패위험과 경제적 부담을 최소화하기도 한다.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은 완벽한 프리프로덕션 방식을 도입해 저예산으로 작품을 완성한 대표적인 사례다. 연상호 감독은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시나리오와 기획을 마무리 지은 후 크랭크인에 들어갔기 때문에 7개월 만에 순제작비 1억2000만원으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저비용·단기간 제작으로 만들어졌음에도 「돼지의 왕」은 부산국제영화제 세 부문에서 수상하는 영예를 안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아직 넘어야 할 장벽이 있기에


이러한 발전과 성장에도 불구하고 장편 애니메이션이 꾸준히 흥행가도를 달리기 위해서는 여전히 넘어야 할 장벽이 남아있다. 우선 제작사가 나름의 ‘철학’을 구축해 차별화된 장편 애니메이션을 창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제작사만의 일관된 철학이 구축돼 있다면 짜임새 있는 시나리오를 엮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디즈니, 픽사, 지브리 모두 나름의 철학으로 대중들에게 작품을 어필하고 회사의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있다. 디즈니는 애니메이션에 ‘어린이의 꿈과 희망’을 제작철학으로 담아내고, 지브리는 ‘자연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을 녹여내는 식이다. 김준양 영화평론가는 “우리나라에서도 ‘연필로 명상하기’나 ‘오돌또기’ 같은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10년 이상 지속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해온 것을 고려한다면 언젠가는 지브리나 픽사 같은 철학이 있는 스튜디오가 생겨날 수 있을 것”이라 전망했다.

가장 시급하게 해결돼야 할 문제는 바로 영화 배급방식이다. 「마당을 나온 암탉」의 오성윤 감독은 “배급, 상영, 기획을 모두 쥔 거대 멀티플렉스가 국내 영화관 대부분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작품성 있는 장편 애니메이션이 제작되더라도 스크린에 오르기 위해서는 교차상영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말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온라인을 통한 배급 루트를 찾자는 움직임도 생겨났다. 현재 저예산 장편 애니메이션과 독립·단편 애니메이션은 인디플러그, 굿다운로더, 씨앗, 씨네21i 등의 디지털플랫폼을 통해 관객과 만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으로는 멀티플렉스의 배급력을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다. 오성윤 감독은 “배급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 직접 시장을 개척하는 대안도 고려 중”이라며 "극장이나 시민회관을 빌려 개봉해 상영관을 늘리는 방식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애니메이션계에 산재한 문제를 차근차근 해결해나가기 위해서는 관련법규를 제정해야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한창완 교수는 “현재 유아용 애니메이션에만 제작자들이 몰려들어 장르 편향이 일어나고 있어 우려된다”며 “법적·제도적 차원에서 소규모 제작사를 지원하기 위한 공적 자금 투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에 2011년 7월 허원제 의원을 중심으로 ‘애니메이션진흥법안’이 발의됐지만 18대 국회가 해산되며 자동 폐기됐다.

지원방향에 대한 구체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염동철 교수(홍익대 애니메이션 전공)는 “현 제도는 애니메이션을 ‘문화와 예술’이 아닌 산업과 연계된 ‘수익창출 콘텐츠’로서 지원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경계해야할 것”이라고 전했다. 현재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지원은 애니메이션의 산업적 측면에만 초점을 둬 시험 삼아 축약한 애니메이션을 선보이는 파일럿 분야에만 머물러 있다.

한국의 장편 애니메이션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는 미래를 꿈꾸며 다양한 소재, 장르, 기법 실험에 매진해 지난 15년간의 침체기를 버텨왔다. 이제 '원더풀 데이즈'를 보내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한국 애니메이션계가 '소중한 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파닥파닥' 비약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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