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

18세기 조선 후기는 농업 위주의 국가 경제가 점차 상공업 위주로 변화하면서 민중들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의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시기였다. 당시 국가 통치이념이던 성리학적 세계관이 뿌리 깊이 자리를 잡고 있는 동안 성리학과는 다른 유교 경전의 해석이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에 새로운 개혁 사상을 바탕으로 조선 개혁의 청사진을 그린 이가 있다. 바로 올해로 탄생 250주년을 맞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이다.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이념을 강조한 당시 북학파의 실학(實學) 사상을 폭넓게 수용해 더 나은 세상을 고민했던 개혁가 다산은 아직까지도 꾸준히 연구되고 있다(『대학신문』 2012년 4월 9일자). 『대학신문』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 기념 인물’이기도 한 다산 정약용의 사상을 일반 대중에게 보급하고자 하는 다산연구소의 박석무 이사장을 만나 다산의 사상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어봤다.


◇당대 대부분의 유학자들은 성리학 제일주의에 빠져 성리학적 해석만을 강조하고 그 이외의 해석들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았던 것으로 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도 다산이 당대의 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독자적인 사상 체계를 확립할 수 있었던 바탕은 무엇인가

다산의 철학을 분석해보면 기본적으로 고경(古經), 즉 유교 경서인 사서육경(四書六經)에서 그 토대를 찾을 수 있다. 다산은 다양한 학자들이 유교 경전을 해석한 것들을 검토해 당시 시대에 맞지 않지 않는 해석을 보다 생산적이고 실학적인 논리로 재해석해냈다. 다산은 이러한 유교 경전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새로운 사상이나 논리가 창출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근본이 되는 사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산은 경전 해석을 통한 철학은 ‘본(本)’에 해당하며 이를 바탕으로 도출되는 현실의 구체적인 방법론은 ‘말(末)’에 해당해 본말이 합쳐져야만 사상의 이론 체계가 확립되고 실제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개혁안이 나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사진: 주현희 기자 juhieni@snu.kr

 


◇그렇다면 다산 사상의 기본이 되는 요체와 그것이 구체적인 경전 해석으로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궁금하다

당나라 학자 한유는 공자의 말 중 “천성적 성품은 서로 비슷하나 습관으로 서로 멀어진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서로 옮겨지지 않는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고 해석해 인간의 성품을 상(上)·중(中)·하품(下品)의 등급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해석은 인간의 성품에 따른 차별을 정당화하고 신분제를 뒷받침하는 데 활용됐다. 그러나 다산은 이를 경전의 잘못된 해석으로 파악하고 한유의 해석을 비판한다. 그리하여 다산은 “요순과 걸주의 성품은 서로 비슷하나 착한 사람과 어울리면 착해지고 악한 사람과 어울리면 악해지니 성품에 본디 정해진 등급은 없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이는 다산 사상의 근간이 되는 ‘인간 평등사상’이다.


◇다산은 경집 232권과 문집 267권, 도합 499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이룬 대저술가이기도 하다. 인간 평등사상을 현실에 적용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은 그의 어느 시기 저술에서 잘 드러나는가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인간 평등사상과 유교에서 말하는, 백성을 본(本)으로 삼는 민본사상(民本思想)에서 발현한 다산의 구체적 방법론은 그의 대표적 저서인 일표이서(一表二書)에서 드러난다. 일표이서는 『경세유표(經世遺表)』(1817), 『목민심서(牧民心書)』(1818), 『흠흠신서(欽欽新書)』(1822)를 함께 이르는 말이다. 강진으로 유배를 간 이후 다산초당에서 경학(經學)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다산은 유배가 끝날 무렵에 경학적 사상을 바탕으로 현실 개혁안을 저술했는데, 이것이 바로 일표이서다. 다산의 일표이서를 통해 그의 정치·사회적 이념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실학자들의 학문적 성격과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당시 사회의 실상을 비판적 안목으로 서술한 일표이서는 조선 후기의 정치·사회·경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일표이서에서 드러난 정약용의 구체적인 개혁 방안은 무엇인가

『경세유표』에서 다산은 조선 사회에서 나타나는 구조적 모순을 개혁하기 위해 인사·토지·부세제도 등 전반적인 제도의 개혁 원리와 방법을 제시했다. 서얼, 천민 등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에 따라 과거를 통해 관직을 주는 ‘무재이능과(茂才異能科)’를 구상하기도 하고, 우리가 흔히 아는 여전제(閭田制)와 정전제(井田制)를 통해 토지 소유문제와 토지 정책을 개혁하고자 했다. 『흠흠신서』는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처벌받는 것을 막고자 형벌 규정의 기본 원리와 지도 이념을 마련하고자 한 책이다. 다산은 중국의 판례를 정리해 죄와 형량을 합리적으로 규정하고자 했다. 앞의 두 책이 제도적 개혁에 관해 논했다면 『목민심서』는 당대 목민관 혹은 공직자들의 인식적 개혁에 관해 논한 책이다. 제도와 법의 개혁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다산은 관료들이 스스로 청렴하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산은 공직자의 마음가짐으로 △자신을 타일러 조심하는 율기(律紀) △공무에 봉사하는 봉공(奉公) △헌신적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愛民)을 꼽으며 올바른 정치를 강조했다. 이렇듯 일표이서는 다산이 방대한 경전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나온 민본중심의 철학적 해석을 구체적인 현실 개혁에 투영시킨, 다산의 대표적 경세론의 산물이다.


◇다산의 개혁 사상은 결국 당대에 실현되지 못했다는 한계점을 지닌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그의 사상이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다산은 ‘미래를 보는 학자’였다. 그가 주장한 현실 개혁론 중 일부는 당시 조정의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 다소 이상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당대에 자기의 뜻을 펼 수 없다고 해서 현실을 수수방관하지는 않았다. 다산은 스스로를 ‘사암(俟菴)’으로 칭했는데, ‘미래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지금 자신이 주장한 것이 당장은 빛을 발하지 못하더라도 연구와 저술을 꾸준히 해두면 후대 언젠가는 자신의 이론이 활용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앞으로의 다산 연구가 어떠한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보는가

현재 다산의 사상 중 구체적 제도 개혁론의 경세적 측면과 기술 발전의 측면에서만 연구가 이뤄지는데 사실 다산을 제대로 연구하려면 다산의 경학을 연구해야 한다. 다산이 사서육경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알아야 그 원리에서 도출된 경세론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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