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헤르만 헤세 사후 50주년

올해 8월 9일은 작가 헤르만 헤세(1877-1962)가 사망한 지 50년이 되는 날이었다. 헤세의 고향인 독일의 칼프와 나중에 정착했던 스위스의 몬타뇰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많은 도시들에서 크고 작은 헤세 관련 행사들이 열렸다. 5월에 독일의 국영방송 ARD는 헤세의 삶을 다룬 특별제작 드라마를 방영했고 학회뿐 아니라 대중적인 전시회, 낭독회, 음악회 등도 많이 열렸다. 우리나라에서도 1926년에 헤세의 『싯다르타』가 처음 번역된 이후로 시, 소설 뿐 아니라 수채화 선집까지도 지속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다가오는 10월 20일에는 한국헤세학회가「21세기와 헤르만 헤세」라는 주제로 일반대중을 상대로 독일문화원에서 학술행사를 펼친다.

헤세는 독일어로 글을 쓴 작가 중에서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힌 작가로 꼽히고 그가 1946년 노벨문학상을 탔을 때 ‘과감함과 깊이’와 더불어 ‘고전주의 휴머니즘과 지고한 문체’를 대변하는 영감(靈感)의 작가라는 평을 받았으며 대체로 낭만주의자, 평화주의자, 개인주의자로 평가된다. 특히 68년 이후에 미국과 유럽에서 일어난 청년문화에 깊은 영향을 줬고 자기 안의 자아를 찾으라는 메시지를 담은 『싯다르타』, 『황야의 이리』와 『유리알 유희』는 당시 새로운 청년문화의 경전이 됐다. 헤세의 작품을 읽은 독자들은 그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주제와 형식을 찾아볼 수 있다. 위의 세 소설 뿐 아니라 첫 소설 『페터 카멘친트』, 이어지는 『수레바퀴 아래서』, 『크눌프』, 『청춘은 아름다워라』,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등에서 세상은 이분법 속에서 펼쳐지는 삶의 학교로 등장한다.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선과 악, 정신과 경험, 지성과 야성, 부성과 모성, 외면과 내면 등 이원론적인 자아관, 양극성의 철학과 세계관이 대립과 갈등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며 결국 주인공의 체험과 수용, 인식의 과정을 거쳐 합일과 단일성, 전일성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이 일관된 주제이다. 아마도 한국에서 고통스러운 중·고등학교 시절을 겪은 독자들은 특히 마울브론 수도원 학교 체험에 바탕을 둔 『수레바퀴 밑에서』나 『데미안』에 묘사된 현실에 공감하겠고 『황야의 늑대』에서 주인공 하리 할러가 겪은 유희의 세계와 현실 세계의 대립은 현대의 가상세계(게임/텔레비전/뉴미디어)와 현실세계로 바꿔 놓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일관된 주제는 실제 작가의 삶과 관련이 깊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선교사 집안인 외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인도와 동양의 영향을 받은 것을 지적하지만 슈바르츠발트의 독실한 신교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그에게 동양과 서양의 두 세계는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세계가 아니었다. 동양의 세계는 그의 평생 동안 대안으로, 선망의 세계로, 혹은 불만과 갈등의 세계로 표출됐고 작가의 독서와 체험적 삶의 인식을 거쳐 동양과 서양의 두 세계는 통합이 이뤄져야 했다. 헤세는 서양의 문학(독일의 낭만주의)과 철학(생의 철학, 니체)과 신학(기독교)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동양의 고전 세계에서도 큰 감동을 받았다. 당시에 유럽에 일었던 인도와 중국 붐에 따라 헤세는 당시 대가들의 인도와 중국의 고전번역과 연구서를 통독했다. 『바가바드기타』, 『석가』, 『베다의 육십 우파니샤드』, 『고타마 부타의 연설』, 『도덕경』, 『노자』, 『공자의 대화』 등이 그러한 책이다. (최근에 필자는 헤세의 독서목록을 따라 이러한 동양의 고전을 때로는 처음으로 때로는 새롭게 읽으면서 동양의 지혜가 점차 우리의 주변세계에서 잊혀지고 있다는 현실을 통감하였다.)

헤세는 개인사에 있어서도 많은 고통스러운 체험을 겪었는데 편치 않은 관계에 있었던 아버지의 사망, 첫 번째 부인과 아들의 발병, 그로 인한 가족의 해체, 전쟁 비판 글에 대한 독일 내의 부정적 여론과 비난, 전쟁 발발 후의 경제난 등은 그로 하여금 개인적으로 감내하기 힘든 시간을 겪도록 하였다. 그는 정신분석학자 랑과 융의 치료를 거치며 차츰 다시 글을 쓸 수 있게 됐지만 이러한 분석은 평생토록 필요한 것이었다. 또한 작가는 한때 ‘사랑의 순례’로 유명했던 구스토 그래저가 이끄는 대안 공동체 몬테베리타에 들어가 그들과 같이 기거하면서 자연과 사랑이라는 주제의 새로운 삶을 체험하고 작품 『동방순례』에 그 흔적을 남겼다. 지금 남아있는 당시 자연 공동체에서의 사진들을 보면 헤세를 원조 히피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전후에 그의 문학은 ‘위기의 문학’으로 각광을 받았고 미국에서 60년대 말 헤세-붐이 일었지만 작가는 모든 이가 각자 개인화의 길을 가야할 뿐이고 이들의 정신적 지도자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밝힌 바 있다. 문학과 삶에서 헤세가 끝까지 추구한 것은 자아를 찾아서 자신을 실현하는 것이고 그의 대답은 ‘개인화(individuation)’였던 것이다. 개인화가 융에게는 의식과 무의식에 내재하는 가능성을 수용하고 실천하는 것이었다면 헤세의 문학에서는 양극의 세계를 거쳐 전체로서의 자기를 발견하고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에 독어독문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학생들 가운데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가로 헤세를 꼽은 학생들이 다시금 늘고 있다. 자아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헤세를 읽지 않을까? 다음의 『데미안』의 첫 문장은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 번 음미할 만하다. “나는 나의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으로만 살고자 했다. 그것은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최윤영 교수
(독어독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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