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시간을 기억하는 공간 ③

서울대에는 학교의 ‘명물’이라 불리는 공간들이 존재한다. 이 공간 안에는 제각기 다른 이야기들이 잠들어 있다. 『대학신문』은 총 4회에 걸쳐 각 공간에 담긴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나눠보고자 한다.

연재순서
① 서울대 정문
② 본부 앞 잔디
③ 아크로
④ 자하연

관악캠퍼스의 심장부에 위치한 아크로폴리스(아크로). 1975년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이후 아크로는 학생들의 약속장소에서 학생운동의 진원지까지 다양한 역할을 맡아왔다. 꽹과리 소리와 함께 3천여명이 모이던 80년대의 아크로부터 오늘날의 아크로까지, 꾸준히 울려온 관악의 심장소리에 귀기울여 보자.

아크로, 관악에 둥지를 틀다

아크로는 세로로 중앙도서관(62동)과 행정관(60동), 가로로 인문대(2동)와 학생회관(63동) 사이를 아우르는 2,000㎡ 넓이의 광장을 일컫는다. 아크로는 ‘신성한 이야기에 관한 토론이 벌어지는 공간’이라는 뜻으로 학생들의 사이에서 자연스레 붙은 이름이다. 그러나 모두가 아크로라는 명칭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학부생 심승희 교수(청주교대)는 “‘신전이 위치한 장소’를 뜻하는 아크로보다 ‘직접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광장’을 의미하는 아고라가 더 적합하다는 비판이 학생들 사이에서 일기도 했다”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아크로는 그 명칭을 지금까지 고수해오고 있다.

현재 아크로는 주목(朱木)에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1982년부터 3년간 아크로의 광장에는 여름이 오면 장미꽃이 만발했다. 민주화 열기가 뜨거웠던 1982년에 본부가 조경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천 그루의 장미를 심어서였다. 학생들의 시위를 장미의 가시로 막겠다는 본부의 의지에 학생들은 “빨간색도 흰색도 아닌 ‘정치색’ 꽃이 필 것”이라고 비난했다(『동아일보』1984년 4월 6일자).

1984년 4월 3일 아크로의 장미들은 자취를 감춘다. 교수와 학생 간 간담회 개최를 요구하던 학생들이 학교측의 거부에 장미를 뽑는 농성을 벌였기 때문이다. 잘 뽑히지 않던 몇 그루의 장미나무는 불태워지기도 했다. ‘장미전쟁’이라 명명된 이 시위에서 맨손으로 장미를 뽑다 피를 흘린 학생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다음날 본부는 폐허가 된 아크로의 장미를 치웠고 이후 아크로에서 장미는 찾아볼 수 없게 됐다(『대학신문』1984년 4월 16일자).

보도블럭으로 시공됐던 아크로는 1987년부터 콘크리트로 덮이게 됐다. 속사정은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민주 열사 우종원 군의 추모식이 열린 10월 31일, 경찰은 최루탄을 터뜨리며 아크로에 난입해 행사를 주도한 손영진 학생을 강제 연행했다. 이에 2천명의 학생들이 아크로의 보도블록을 깨 본부를 향해 던졌고 행정관의 유리창과 기물들이 크게 파손됐다. 고광석 시설관리국 주무관은 “학생들의 시위가 격렬해 본부의 직원들은 두려움에 떨며 비상근무를 했다”고 회고했다. 본부는 투석전을 방지하기 위해 아크로를 콘크리트로 포장했다. 이렇듯 아크로는 학생운동과 학생사회의 아성으로 자리하며 그 모습을 달리해왔던 것이다.

사진: 대학신문 사진부 DB


아크로, 학생운동의 성지가 되다

동숭동캠퍼스를 휩쓸던 민주화의 열기는 관악캠퍼스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아크로에서 열린 학생운동의 신호탄은 1975년 3월 24일 열린 ‘학원민주화를 위한 자유 성토 대회’다. 아크로에 모인 천여명의 학생들은 민주적 학칙 제정과 학원 사찰 중지 등을 요구했다.

‘서울의 봄’ 이후 아크로는 진보 담론의 성지로 거듭났다(사진 ①). 정용욱 교수(국사학과)는 “1980년대 들어 학생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운동권 문화가 관악에 급속하게 확산됐다”고 말했다. 1980년 12월 11일 관악의 학생들은 아크로에 모여「반제 반파쇼 투쟁 선언」을 발표하며 전두환 정권을 비판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열린 최초의 시위였다. 1987년에는 약 5천여명의 학생들이 아크로에 모여 ‘박종철 고문살인 규탄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날 아크로에 결집한 학생들은 시청 근방까지 행진했고, 이 발자국에는 ‘6·10 항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크로가 직선제 개헌이라는 큰 열매의 씨앗이 된 것이다.

1980년대 들어서는 여성 인권에 대한 관심이 증가해 아크로에서도 여성운동이 꽃폈다. 1984년 신설된 총여학생회는 아크로에서 ‘여권 신장을 위한 토론회’를 개최해 여학생 휴게실 설치라는 결실을 거뒀다. 또한 해마다 ‘자알제’라는 여성축제를 열어 여성근로자의 애환을 학생들과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학생사회에 위기가 도래하면서 아크로 역시 위기에 처하게 됐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치 문제에 대한 대학생들의 관심이 현저하게 줄어든 까닭이다. 이러한 경향은 2006년 49대 총학생회에 출마해 당선된 「서프라이즈」 선본의 공약으로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아크로 집회를 금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들의 공약은 집회로 발생하는 소음을 줄이겠다는 취지에서 제시됐으나 학생들은 4·19 정신의 실종이라며 애도를 표했다(『대학신문』2006년 5월 1일자).

2011년 5월, 아크로에서는 80년대의 열기를 재현하듯 다시 학생운동이 벌어졌다(사진 ②). 법인화에 반대하는 2,300명의 학우들이 아크로에서 열린 비상총회에 참석한 것이다. 이날 비상총회에서는 설립준비위원회 해체와 행정관 점거가 결의됐다. 그러나 현재 아크로에서는 축제와 일부 행사가 열릴 뿐 2011년 5월 아크로를 뒤덮은 학생들의 열기를 떠올리기 어렵다. 아크로를 스쳐지나가기만 하던 당신, 아크로에 멈춰 여기 깃들어 있는 관악 학우들의 숨결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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