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잘 살고 싶어 한다. 그런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 아마도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고, 갖고 싶은 것을 마음껏 가질 수 있는 삶일지 모른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내가 하지 않고 남을 시킬 수 있는 삶일지 모른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 건강하고 풍요로운 가정을 꾸림으로써 대대손손 번영하는 삶이기도 할 것이다. 에릭 프롬이 보기에 이 모두는 ‘존재’가 아닌 ‘소유’를 기준으로 한 삶이다.

그런 삶에는 돈과 권력과 명예가 필요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다. 특히 어떤 직업을 가지느냐가 삶의 질을 좌우한다고 생각한다. 돈과 권력과 명예가 다 보장되는 ‘좋은 직업’은 한정돼 있기에 ‘좁은 문’을 향한 질주가 불가피하다. 그 질주의 성패는 일차적으로 ‘좋은 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는 데에 달려있다. 그래서 모든 개인과 가정의 에너지는 최종 심급(審級) 학교인 좋은 대학(원) 진학 경쟁에 수렴된다. 그리고 모든 대학(원)의 에너지는 졸업생들을 얼마나 좋은 직장에 취업시키는가에 집중된다.

하지만 사람들이 태어나서 살다가 죽어가는 모습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러한 소유와 질주의 도식이 좋은 삶을 보여주는 것 같지가 않다.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 주위의 좋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다 좋은 삶을 살고 있는가? 좋은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다 좋은 삶을 살고 있는가? 돈과 권력과 명예를 가진 사람들은 정말로 행복한가? 우리는 경제적으로 풍요한 한국인의 행복지수가 빈곤한 네팔인의 행복지수보다 훨씬 더 낮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삶의 질은 과연 어떻게 평가할 수 있으며, 무엇에 좌우되는 것인가?

나는 바로 ‘질(質)’이라는 말 속에 해답이 있다고 믿는다. 공자는 <논어>에서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질이 문을 압도하면 거칠고, 문이 질을 압도하면 틀에 갇히게 된다. 문과 질의 어우러짐, 그것이 군자의 길이다)”고 하였다. 여기서 質은 바탕을, 文은 무늬를 의미한다. 質은 인간의 손길이 닿기 이전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의 상태를 말하며 있는 그대로의 들판, 즉 野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인간 문화의 핵심인 문자와 글월이 곧 文이며 문자로 쓰인 문화의 자취가 역사, 즉 史이다.

문질빈빈은 모든 존재의 바탕인 질(context)에서 존재자의 문(text)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또 그 문을 본래의 질로 환원 혹은 해체하여 어떻게 더 나은 재구성을 모색할지에 관심을 가지고 부단히 성찰하는 넘나듦의 실존 철학이다. 문은 표현태로서 ‘채워져 있는 세상’이다. 그와 달리 질은 본래, 본질, 근원인 생성태로서 ‘비어 있는 가능성’이다. 당장 눈앞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부와 권력과 명예, 지식과 기술과 가치에 지나치게 집착하다 보면 그런 것들이 본래 무엇이며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를 망각하게 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존재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소유의 노예’가 된다.

나는 한 사람의 삶의 질이 문질빈빈의 태도와 역량에 좌우된다고 믿는다. 주어진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부단히 그 근본을 물음으로써 초월적이고 창조적인 구성과 재구성에 매진하는 삶이야말로 정말 질이 높은 삶이다. ‘좋은 직업’을 갖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않고, 어떤 일을 하며 살다 죽더라도 문질빈빈의 태도로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사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교육, 연구, 정치, 경제 등 어떤 삶에서도 문질빈빈을 중시하는 사회야말로 삶의 질이 높은 사회이다. 그렇다면 우리 서울대는 이런 의미의 삶의 질을 얼마나 깊이 염려하고 배려하는 학교인가? 서울대 교수와 학생들의 삶의 질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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