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통령 선거에 대한 여론조사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웹을 통한 조사였는데, 그 조사의 결과를 받아보고 깜짝 놀랐다. 일반적으로 여론 조사의 주관식 문항에는 응답률이 낮은 편이고 응답하더라도 한두 단어, 길어야 한두 문장 정도로 답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컴퓨터를 이용한 조사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꽤 긴 답을 내어 놓았던 것이다. 정부에 대한 불만, 대통령 후보에 대한 바람, 한국 정치에 대한 비판 등등……. 새삼 한국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들을 꾹 참으며 살고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얼마나 갑갑했으면 누가 읽어볼 지도 모를 웹 설문 조사에, 그것도 정치에 관련된 불만을 이렇게 쏟아놓아야 했을까. 이런 국민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받아주지 못하는 한국 정치의 한계에 절망하면서도, 유난히 심중에 치미는 울화를 참고 살아야 하는 한국인들의 신산한 삶에 대해서 쓸쓸한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억울한 일, 화나는 일들을 속에 담아두기만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스트레스다. 그런데 요즘 한국인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이 스트레스를 푸는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고 있는 중이다. 언론에도 몇 번 보도된 바 있는 트위터의 ‘대나무 숲’ 열풍이 그것이다. 사회 각 분야의 사람들이 같은 트위터 계정을 공유하며 자신이 당한 억울한 경험과 암담한 현실을 토로하고, 또 그러면서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것이다. 한 출판 노동자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출판사 옆 대나무 숲’에서 시작된 이 실험은, 이제 인문계 대학원생, 신문기자, 국회 보좌관, 영화 스태프, 중·고등학생, 백수, 심지어 성노동자들에게까지 매우 빠른 속도로 번져나갔다. 현재까지 내가 본 것만 80개가 넘는 대나무 숲 계정이 만들어졌는데, 그 중 상당수는 애초에 활발하게 공유되다가 지금은 거의 활동이 없는 상태다. 처음보다는 그 열기와 관심이 상당히 줄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몇몇 대나무 숲 계정은 비교적 잘 운영되고 있다. 이것이 하나의 새로운 경향으로 정착될 지 아니면 그저 지나가는 인터넷의 반짝 흥밋거리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대나무 숲 계정에 올라오는 글은 140자로 압축된 무수한 삶의 조각들이다. 종종 그 글들을 읽을 때면 귓가에서 대나무 이파리들이 서로 몸을 부비대며 내는 소리를 듣는 듯 한 착각이 든다. 한 사람의 목소리인 듯 같은 고민을 토로하다가도, 이내 그 목소리들은 여러 개로 갈라져 서로 다투고 경쟁하다 또 갑자기 잠잠해지곤 한다. 오히려 그 일관성 없음이 정말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오고가는 수많은 생각의 조각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롭다.

대나무 숲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항상 옳지도 않고, 그들의 억울함, 분노에 늘 공감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종종 그들은 감정 과잉이고 세상에 미숙할 뿐이다. 때로는 그들이 고발하는 대상들에 오히려 동정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나무 숲의 이야기를 들으며 깨닫게 되는 것은, 타인에게 말 걸고자 하는 행위가 얼마나 인간적인 욕구인가 하는 사실이다.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속내를 어쩌지 못해 정말 대나무처럼 마음이 텅 비워졌을 지도 모를 그들이 가여우면서도, 울창하고 푸른, 거친 바람에도 꿋꿋한 대나무 숲으로 그 목소리들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그런 희망을 꿈꾸게 된다. 같은 목소리 안에서 다른 생각이 조화가 되는 그런 세상, 생각만 해도 멋지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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