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1917-2012) 추모

20세기가 낳은 가장 뛰어난 역사학자이자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인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선생이 지난 10월 1일 타계했다. 95세라는 천수를 누렸지만 그래도 그의 죽음이 아쉬운 까닭은 학자로서, 지식인으로서 홉스봄은 누구에도 비견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쏟아진 애도 물결이 그 사실을 입증한다. 영국의 주요 일간지가 그의 서거 소식을 1면 가득 실은 이유는 그가 세계적인 저명인사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큰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유태계 영국인 아버지와 오스트리아인 어머니 사이에 이집트에서 태어난 홉스봄은 빈과 베를린에서 자랐다. 양친을 잃은 후 삼촌을 따라 런던에 정착한 홉스봄은 장학금을 받아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라는 평을 들은 홉스봄은 곧바로 케인즈, E. M. 포스터 등이 속했던 배타적인 엘리트 동아리 ‘사도들(Apostles)’에 초청되었다.

홉스봄은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라고 불리지만 그런 표현을 한창 넘어선 지식인이다. 그는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한 직후 베를린에서 공산주의에 빠져들었고 영국에 와서도 국제공산주의 청년운동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는 1956년 소련군의 헝가리 침공 후 많은 좌파 지식인들이 공산당을 떠났을 때 당에 남은 것으로 유명하다. 필자는 언젠가 홉스봄과 대화하면서 그 이유를 물었다. 그는 “고난을 함께 했던 동지들을 배반할 수 없어서”라고 답했다. 홉스봄은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공산권의 전체주의 체제를 비판했고 경제적 결정론과 같은 도식을 거부했으며 인간의 의식과 문화를 경제적 조건 못지않게 중시했다. 구소련에서 그의 저작이 한 권도 출간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실 정치에서 홉스봄은 노동당을 지지했다. 1980년대에 대처 총리에게 패배한 노동당이 더욱더 좌파의 길을 갈 때 그는 노동당이 오히려 유연해져서 대중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일갈했다. 닐 키녹과 토니 블레어는 그의 가르침을 좇아 노동당을 대중정당으로 변모시킴으로써 18년 만에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역사학자로서 홉스봄의 업적은 무엇보다도 『혁명의 시대』로부터 『극단의 시대』에 이르는 일련의 저서를 통해 근대 역사를 총체적으로 보여준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혁명의 시대』는 같은 시기에 일어난 영국 산업혁명과 프랑스 정치혁명을 ‘이중혁명’이라는 개념으로 조명했는데, 이 개념은 그 후 근대사회를 분석하는 기준이 되었다. 『자본의 시대』의 자본가 층은 감탄할만한 역동성을 가지고 변화를 추구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무덤을 파게 될 노동계급을 탄생시키고 말았다. 한편 『제국의 시대』는 유럽과 주변부가 자본주의의 끈으로 연결되면서 놀랄만한 경제적 역동성을 보이지만 불평등과 비대칭을 야기하고 끝내는 세계대전의 파국을 맞게 된 시기를 다룬다. 마지막으로 『극단의 시대』에서 홉스봄은 파국과 번영의 극단을 오간 짧은 20세기를 서술하면서 특히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사건인 공산주의 실험을 조명한다.

두 번째로 기억할 홉스봄의 업적은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개척한 선구자라는 사실이다. 1950년대까지 역사연구의 주제는 엘리트였는데 그는 그동안 조명 받지 못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밝히는 어려운 작업을 시작함으로써 역사학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영국의 노동계급, 이탈리아의 농민반란, 라틴아메리카의 의적이 그의 연구 덕분에 살아났다. 그러나 홉스봄은 얼치기 좌파 학자들처럼 약자를 일방적으로 미화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을 저항으로 몰아간 상황을 고발하고 그들의 용기를 찬양했지만 동시에 그들의 무모함과 잔인함에도 눈감지 않았다.

홉스봄의 말년의 관심은 민족주의에 집중되었다. 진정한 세계인으로서 홉스봄은 민족주의의 폐해를 끊임없이 지적했다. 그는 민족이 태고부터 존재했던 개념이 아니라 특정시대에 나타난 것이며 본질적으로는 위로부터 만들어진 정치적 가공물임을 지적했다. 특히 1880년대 유럽에서 민주주의와 대중정치가 시작되자 통치엘리트가 대응책으로 착안한 것이 대중동원의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였다는 것이다.

홉스봄은 전 지구적 역사를 꿰뚫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를 넘나드는 그의 지식은 가까이 접한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는 역사를 공부한 것에 자부심을 느꼈고 정치현상을 판단할 때 역사적 안목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종종 언급했다. 1987년 봄에 서울을 방문한 홉스봄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억제되고 있음을 안타까워했지만 동시에 급속한 근대화에 감탄했고 필자에게는 ‘네가 북한이 아니라 남한에 태어난 것은 다행’이라고 했다.

홉스봄의 자본주의 비판은 공산권 붕괴 후 지지를 잃었다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다시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위기가 1930년대 대공항 만큼이나 심각하다는 그의 판단에는 동의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필자도 젊은 시절에는 홉스봄의 영향력 하에 있었지만 지금은 많이 벗어나 있다. 그럼에도 그의 가르침 하나는 영원히 남을 것이다. 즉 인간과 역사, 특히 약자에 대한 따뜻한 이해가 필요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항상 실천할 자신은 없지만 그 가르침을 기억하겠노라 다짐해본다.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의 ‘장미 기사’와 빌리 홀리데이의 재즈와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를 사랑했던 홉스봄 선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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