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을 몸소 느끼는 기준은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우리로 하여금 공통적으로 빈곤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몇 가지의 풍경이 있다. 종이 박스로 바람을 막으며 잠을 청하고 무료 배식차 앞으로 길게 줄 서있는 노숙인들, 아직도 이런 곳이 있나 싶은 달동네 판자촌, 그리고 거리 곳곳을 다니며 폐지를 줍는 노인들의 리어카. 끊임없이 세련됨을 갈망하는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질척한 발자국들이다. 일종의 스테레오 타입에 해당되는 이러한 풍경들의 다소 충격적인 진실은, 빈곤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만연해있다는 사실이다. 노숙인들을 ‘퇴치’하기 위한 서울시의 눈물 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터미널, 서울역 등지에는 노숙인이 촌을 이루고 있으며 중심가에서 조금 비껴나면 작은 집들로 언덕을 빽빽이 채운 달동네와 어른이 다리 뻗지 못할 크기의 쪽방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특히 길을 걷다보면 폐지 줍는 노인들의 구부정하고 느린 리어카 걸음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는데 이는 지난 『대학신문』 1841호에서 기획으로 다룬 ‘황혼의 빈곤, 관악구 폐지 노인들’에서 알 수 있듯이 관악구가 ‘폐지 노인’이 가장 많은 지역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폐지 노인 기획은(겉만 봐서는 알 수 없었던) 폐지 노인들의 장시간 고강도의 노동 실태와 노동 대비 현저히 낮은 수입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줬다. 또한 폐지 노인의 일상을 취재하는 것을 넘어 ‘노후 난민’ 문제로 시각을 넓혀 기초수급권 획득에 장애가 되고 있는 부양의무자 기준의 부당성을 언급한 점이 인상 깊다. 실제로 기초수급권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보장된 제도로서 노년층을 비롯한 빈곤계층의 생계와 직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책정 금액이 비현실적으로 낮고, 부양의무자로 간주되는 가족이 부양능력이 안 되는 경우에도 호적상 부양의무자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제반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수급 대상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100만명에 이르고 있다. 장애 자녀를 가진 건설일용직 아버지가 아들의 수급권을 지키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던 사건, 수급권을 얻지 못한 노부부가 동반자살을 택한 사건 등은 부양의무자 기준의 부당함을 여실히 드러낸다. 가장 큰 문제는 최소한의 삶도 보장받지 못한 채 생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에 몰리는 빈곤 문제가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다는 것에 있다.

10월 17일은 UN이 지정한 ‘빈곤 퇴치의 날’이다. 이마저도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더 나아가 빈곤운동진영에서는 이 날을 ‘빈곤 철폐의 날’로 명명한다. 빈곤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빈곤한 사람을 ‘퇴치’하고 변방으로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빈곤을 양산하는 사회 구조에 대한 성찰과 대안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목소리가 결여된 보편적 복지 담론이 횡행하는 시대에 도시 속 빈곤의 풍경이 안겨주는 고민이 소중하다.

이아로미
미학과·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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