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지하철 2호선 내부. 대부분의 승객들이 스마트폰을 부여잡고 있다. 음악청취, 방송시청, 카톡, 애니팡... 그때 무언가 신경을 자극하는 기계음이 들린다. ‘찰칵’. 승객들은 일제히 긴장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누군가 내 사진을 찍은 게 아닐까?’ 짧은 치마의 아가씨는 황급히 치마를 쓸어내리고 쩍벌남은 다리를 오므린다. 불안한 표정으로 서로를 탐색하는 민망한 시선들. 언제 어디서 사진을 찍혀 ‘OO녀’ ‘XX남’이라는 제목으로 내 사진이 온라인에서 돌아다닐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 과연 우리는 프라이버시를 온전히 누리고 있는 것일까?

프라이버시를 위협하는 대표적 요인은 기술 발전이다. 기술 발전의 속도감은 굳이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핸드폰이 익숙한 요즘 청소년들에겐 영화 「건축학개론」에 나오는 삐삐는 구석기 시대 유물처럼 보이리라. 하긴 90년대 중앙도서관 공중전화 앞에는 항상 줄이 길게 늘어섰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면 수강생들은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이곤 한다. 그러나 편리함의 대명사였던 핸드폰은 언제 어디서나 울리는 족쇄가 되어 사생활의 시공간적 영역을 위축시키고 있다. 또한 인터넷도 개인의 프라이버시에 꽤 위협적인 존재이다. 블로그, 미니홈피, SNS를 통해 쉴 새 없이 공유하는 정보들은 삶의 기쁨과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진학, 취업, 결혼 등에서 의외로 발목을 잡는 경우가 심심찮게 보도되어 왔다. 더 나은 삶을 위해 개발된 신기술들이 우리를 감시하는 존재로서 Digital Panopticon(전자 원형감옥)’이 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언론은 프라이버시를 위축시키는 또 다른 세력이다. 사실 프라이버시라는 개념 자체가 언론으로부터 위협받는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되었다는 사실은 프라이버시와 언론의 본질적 상충관계를 말해준다. 1890년 언론의 취재공세에 시달리던 미국의 두 법률가가 「The Right to Privacy」라는 논문을 통해 프라이버시를 법적 권리로서 보호해야할 필요성을 주장한 이래로 프라이버시권은 각국 법원에 의해 기본적 인권으로서 보호받고 있다. 그럼에도 언론의 프라이버시 침해는 현재진행형이다. 망원렌즈나 몰래카메라의 이용은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고전적 취재방식이다. 최근 영국에서는 언론이 한 술 더 떠 취재원들의 핸드폰을 해킹하여 특종을 얻고자했던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 소유의 영국의 대중지 「News of the World」는 수년간 취재원들을 해킹한 사실이 드러나 결국 폐간되었으며 편집장과 기자들은 법정에 서게 되었다. 이로 인해 영국 언론의 신뢰도는 바닥을 치고 있으며, 설문조사 결과 시민 응답자의 과반수가 언론에 대한 엄격한 법적 규제를 찬성하고 있다. 결국 영국 언론은 ‘감시견’이 아니라 ‘주인을 무는 애완견’이라는 비판 속에서 자성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시끌벅적하게 서로의 내밀한 영역을 엿보고 떠들어대는 요즘, 흥미로운 영화가 개봉되었다. 「사랑의 침묵」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는 런던의 봉쇄수도원에서 묵언수행중인 수녀들의 삶을 담았다. 그중 한 수녀의 인터뷰가 눈길을 끈다. “침묵은 생각까지 다스립니다. 그러면 침묵은 음악이 되죠.” 침묵을 음악처럼 느끼는 경지에 오르기는 쉽지 않겠지만, 이 청명한 가을날 하루쯤은 스마트폰과 컴퓨터의 전원을 꺼보자. 그리고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여보자. 나의 보호받고 싶은 내밀한 영역을 발견하고 남의 그러한 부분도 소중히 생각해주는 것, 이것이 프라이버시가 상실되어가는 시대에 꿰어야 할 첫 단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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