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 이 책] 검열과 표현의 자유 - 『잠시 검열이 있겠습니다』

“인생은 독한 술, 웃기고 앉았네. 아주 놀고 자빠졌네.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아주 쌩쑈를 하네.”(「라잇 나우」)「강남스타일」로 전 세계에 다시 한류 열풍을 일으킨 가수 싸이의 정규 5집 수록곡「라잇 나우」의 일부 가사다. 하지만 이 노래는 가사에 술·담배라는 단어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19금’ 즉, 청소년 유해매체 판정이 내려졌다. 그런데 국제공연을 마치고 금의환향한 싸이 앞에 여성가족부가 이 노래에 대한 청소년 유해매체물 판정 취소를 발표하면서 19금 판정기준에 대한 대중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싸이의 노래 가사가 수정된 것도 아닌데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판정이 번복됐냐는 것이다. 최근에는 블로그에 성기 사진을 게재해 법적 조치를 받았던 박경신 교수(고려대 법학과)에게 무죄선고가 내려지기도 했다. 이 사건들은 우리 사회의 표현의 자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며 검열의 기준과 범위에 대한 한국 사회의 논의가 필요함을 알려줬다.

현 정부 출범 이후 표현의 자유가 위축됐다는 우려 속에 최근 검열 실태를 고발한 책 『잠시 검열이 있겠습니다』가 출간됐다. 과거 기자로 활동하기도 한 저자 한만수 교수(동국대 국문학과)는 “우리나라의 검열제도는 애초부터 잘못됐다”는 문제의식에서 검열에 대한 진실을 풀어냈다. 저자는 “그동안 민주언론 투쟁에서 무력했던 입장을 취했던 자로서 최소한의 속죄행위로 이 책을 출간했다”고 밝히며 저서를 통해 무분별한 검열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음을 고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검열’은 언론·출판·예술 분야 등의 내용을 사전에 심사해 그 발표를 통제하는 행위를 뜻한다. 저자는 제도상으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검열의 그림자가 남아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불행히도 어떤 형태로든 검열이 존재하지 않은 시대는 없었다”며 “인류에게 언어가 생기고 권력이 생기자마자 검열은 탄생했다”고 말했다. 덧붙여 그는 검열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진화했다고 지적한다. 중세에는 종교검열이 주를 이뤘고 근대에는 국가검열로 이행됐으며 현대에는 자본검열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검열제도는 일제 식민지 시기에 본격 도입됐다. 이 때 검열은 ‘당연한 것’이었고 이후 군부 독재 시기에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권력자들에게 검열은 ‘지식과 정보가 권력을 유지하는 주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언어는 사고를 규정하며 사고의 변화는 현실의 변혁을 추동해내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식과 정보를 독점하고 대중을 무지의 상태에 감금함으로써 통치 기반을 견고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 검열제도는 자본의 장악 아래 놓이게 됐다. 정치권력에 의한 검열이 법과 같은 제도적 장치에 의해 눈에 띄게 행해졌다면 이제 자본에 의해 통제되면서 보이지 않게 작동하게 된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삼성으로 대표되는 거대 재벌들이 이러한 권력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례로 보수성향 언론은 물론 진보성향의 언론조차도 삼성의 비리를 고발하는 책『삼성을 생각한다』의 광고 게재를 거부했다. 2006년 「시사저널」은 삼성을 비판하는 기사를 일방적으로 삭제하기도 했다. 삼성으로 대표되는 자본권력은 정권의 정책 방향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뿐만 아니라 한국의 담론장마저 흔들고 있다.

물론 저자가 무조건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표현의 자유가 무제한적으로 허용될 수는 없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검열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불순한 의도를 가진 음란물과 상업성을 지닌 경우에는 제한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즉, 최소한의 원칙은 모두가 어느 정도 합의할 수 있는 ‘사회적인 합의’를 통해 도출돼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대안으로 ‘착한 검열’을 제시했다. ‘착한 검열’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나와는 다른 의견, 저속해 보이는 표현, 조금 위험해 보이기까지 하는 표현이더라도 이를 관용하는 태도와 모두가 공정하게 참여할 수 있는 담론장이 필요하다. 그리고 시민들의 자기표현과 결정권을 보장하는 것은 필수조건이다. 더불어 권력은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저자가 강조하듯 구조를 바꾸려는 움직임은 이미 시작됐다. 식민지 시기부터 인터넷을 쓰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말하려는 자와 틀어막으려는 자 사이의 숨바꼭질은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 인류 지성사를 통틀어 현대까지 영향력을 끼친 소크라테스, 간디, 갈릴레이, 루소, 톨스토이, 정약용, 박지원의 공통점은 이들이 검열의 희생자들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우린 기억해야 한다. 이들을 검열했던 권력자나 검열관의 이름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래서 저자는 말한다. “승리는 결국 말하려는 자에게 돌아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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