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현지조사 실습을 나갔을 때, 나의 정보제공자가 되어주셨던 할머니 한 분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한국의 전통문화와 가양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할머니께서 살아오신 흥미진진한 인생 이야기도 풀어놓게 되었는데, 그때 해주셨던 조언 중 하나가 절대로 남에게 빚을 지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남편분의 빚을 갚느라 평생을 고생하셨기 때문인지 할머니는 아직 젊은 사람들이 신용불량자가 되었어도 힘내서 살아보려고 노력하는데, 사회가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비판하시면서 그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가혹한지 생각해봐야 한다고도 말씀하셨다.

어쨌든 내게는 부채를 지는 것의 위험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던 일로 기억되었는데, 여름에 김훈의 『자전거여행』에서 마암분교에 대해 쓴 ‘꽃피는 아이들’이라는 글을 읽고는 빚을 진 사람의 삶에 대해서 좀 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열심히 살았던 사람이 갑자기 신용불량자가 돼 모든 것을 잃고 빈집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모습, 그런 아버지를 둔 아이의 삶에서까지 깊이 느껴지는 상실과 불안이 어찌나 무겁던지. 단지 읽어보았을 뿐인 그 삶의 무게가 한동안 내게도 묵직하게 남아있었다.

이때에도 여전히, 부채에 대한 내 생각은 변함없이 ‘절대로 지면 안 되는 것’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파푸아 뉴기니의 가와(Gawa)섬에서 이루어지는 쿨라 교환 체계에 대한 낸시 문의 글을 읽고는 부채가 절대로 져서는 안 되는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가와섬 사람들은 다른 섬 사람들과 선물을 교환하면서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나간다. 이때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선물을 주도록 설득하는 능력, 즉 자기 스스로 빚을 창출하여 관계를 맺는 능력을 통해서 그리고 부채를 규칙적으로 갱신함으로써 관계를 유지시키는 능력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널리 퍼뜨리는데 이러한 존재의 확장은 곧 높은 명성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그들은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얻기 위해, 자신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창출해내기 위해 부채를 지는 것이다.

다른 한편 부채는, 『부채 그 첫 5000년』에서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인간경제(human economy)’라고 칭했던 사회들에서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고 상호부조와 연대의 관행을 통해 공동체를 유지하는 매개로 작동하는 것이기도 했다. 티브족은 이러한 부채의 실례를 잘 보여준다. 로라 보하난이 나이지리아 시골 지역의 티브족 공동체에 들어갔을 때 이웃들로부터 선물을 받았고, 이에 보답해야 했다. 그녀는 누구도 지난번에 받은 선물의 가치와 똑같은 것으로 갚지 않음으로써 선물의 순환이 무한히 이어지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티브족은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지속적으로 부채를 갱신해나가면서 그들의 사회 자체를 재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공동체에서 부채의 완전한 청산은 관계의 청산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사람들은 권력과 명성을 얻기 위해, 자기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의미와 가치 생산에 참여하기 위해 공동체 안에서 존재하기 위해 부채를 져왔고, 지고 있다. 이렇게 보면 부채는 위험하면서도 매력적인 것이기도 하고 사회적 존재의 전제조건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일어나는 파산의 주요 원인이 병이라고 하는데 이런 점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채의 의미를 묻는 것은 여전히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기억해둘 것은 부채, 그리고 부채를 지는 행위의 의미가 단순히 금전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 맥락들을 두루 살필 때에 더욱 풍부하게 이해될 수 있으리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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