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에서 여론조사가 본래의 역할을 넘어 너무 과도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견이 있다. 일부 정치학자들은 여론조사가 참고의 수준을 넘어 정치 과정의 하나로 자리잡은 이 현상을 ‘여론조사 민주주의(Survey Democracy)’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한국갤럽 허진재 이사는 “정치 과정에서 여러 의사결정 과정에 여론조사를 활용하는 것은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강원택 교수(정치외교학부)는 “여론조사가 여론의 흐름을 읽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고 언급하면서도 “여론조사의 응답은 투표와 달리 책임이 뒤따르지 않는 응답이기 때문에 후보를 결정하는 등의 정치적 결정은 여론조사가 아닌 보다 직접적인 참여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가령, 대선이나 총선의 경우 국민에게, 당내 경선의 경우 당원들에게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이 있다. 하지만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여론조사의 경우는 책임의 주체가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도 현재 우리나라 정치 곳곳에서 여론조사가 과도하게 사용되고 있다. 국민의 여론을 참고해야 하는 정당의 공약 등을 선정할 때는 물론 정당정치의 틀 속에서 후보 경선 및 후보 단일화까지도 ‘여론의 흐름을 읽는다’는 취지 하에 여론조사를 이용해 이뤄지고 있다. 여론조사가 더 이상 참고사항이 아니라 정치 과정의 일부가 됐다며 일부 학자들이 냉소적으로 만든 용어인 ‘여론조사 민주주의’가 진정 현실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강원택 교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참고용으로는 모르겠지만 기술적 한계나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여론조사를 중요한 정치적 결정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리얼미터 이택수 대표는 “여론조사 결과가 오차범위 내로 나오게 된다면 통계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며 “여론조사는 참고자료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결정의 방법이 돼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실제로 2002년 당시 대선후보였던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 당시, 한국갤럽과 미디어리서치 등의 여론조사 기관들은 ‘여론조사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오차를 무시하고 어떻게든 후보를 결정해야 하는 것’에 부담을 느껴 조사를 거절하기도 했다.

여론조사는 여론을 예측할 수 있는 좋은 도구이지만 여론 그 자체는 아니다. 이에 대해 한국갤럽 박무익 회장은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여론조사는 대중심리의 지도를 만드는 것이지 내비게이션을 만드는 것과는 다르다”고 언급했다.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앞둔 지금, 우리 모두 그의 일침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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