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은 서울시 최초로 관광특구로 지정됐으며, 올해 지정 15주년을 맞이했다. 이를 기념해 지난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2012 이태원지구촌축제’가 열리기도 했다. 프랜차이즈 업체가 즐비한 기존의 번화가 신촌, 홍대, 강남 등지와 다르게 이태원은 독특한 다문화주의가 꽃피는 대안 공간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이태원로의 남쪽은 각각 문화적·인종적·성적 차이를 인식하고 포용하는 공간적 특성을 보인다. 『대학신문』에서는 이태원 남쪽 지역을 찾아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대안 공간으로서 이태원의 가치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논해봤다.

다문화주의가 싹트는 공간, 이태원

지하철을 타고 6호선 이태원역에 도착하면 서울이 아닌 것 같은 경관이 펼쳐진다. 역 플랫폼에서부터 다양한 얼굴색을 지닌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지상으로 나오면 영어, 일본어, 아랍어 등 세계 각국의 언어가 적힌 간판들이 줄지어 방문객을 맞이한다. 홍성태 교수(상지대 문화콘텐츠학과)는 “이태원은 세계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이 혼재돼 다문화주의가 시작되는 장소”라고 말한다.

‘이태원’하면 일반적으로 이국적인 고급 레스토랑이 즐비한 거리를 떠올리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이태원이 오로지 상권으로만 대변되는 공간은 아니다. 이국적인 식당과 기념품점과 같은 다양한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관광거리’로서 기능하면서도 이태원은 실제 그 속에 살고 있는 다문화적 삶의 양식을 확인 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태원이라는 공간을 아우르는 키워드는 다문화주의다. 다문화주의의 핵심은 관용과 다양성의 존중에 있다. 정상준 교수(영어영문학과)는 “다문화주의는 다양한 종교적, 인종적, 민족적 그리고 나아가 성적 취향 차이까지를 받아들이는 관점”이라고 말한다. 다문화주의는 특히 사회에서 소외받아왔던 비주류 집단의 문화에 주목해 이를 둘러싼 차별과 배제를 지양하고자 하는 태도다.

 

사진: 주현희 기자 juhieni@snu.kr


이태원의 다문화적 특성은 이태원로의 남쪽에서 보다 잘 드러난다. 이태원 소방서를 따라 보광동 언덕으로 올라가면 골목마다 아프리카 거리, 게이힐, 이슬람 거리 등 저마다의 이름이 명명돼 있다. 거리 이름에 걸맞게 사회에서 소외된 소수자들이 하나둘씩 이태원에 둥지를 틀면서 독특한 비주류 문화를 가꿔나가고 있다. 성적으로 보수적일 것이라고 생각되는 이슬람 공동체가 퀴어 공동체와 같은 거리를 점유하는 것은 이태원 남부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묘한 그림이다. 바로 여기에서 진정한 다문화주의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이태원에 세계를 담아라

이태원 지역은 광복 이래 서울에서 가장 많은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활동하던 곳이다. 용산구 통계연보에 따르면 현재 이태원에는 나이지리아, 미국, 일본 등 총 80개국 출신의 이주민들이 거주 중이다. 중국인이 주를 이룬 가리봉동 등지의 외국인 밀집 지역과 달리 이태원을 구성하는 피부색은 다채롭다. 또한 단기 숙소에 머무는 일시적인 방문객부터 한국 국적을 취득한 이민자까지 이태원에는 각계각층의 이민자가 존재한다.

국경 없는 이태원

기자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이슬람성원에서 제일기획 뒤편으로 이어지는 이슬람 거리. 이 거리에는 이슬람식으로 도축한 고기만 판매하는 정육점 ‘할랄(Halal)’과 식품점, 히잡가게, 이슬람 전문서점 등이 입점해 있다. 이 거리는 1976년 국내 최초로 한국이슬람중앙성원이 건립되면서 조성됐다. 성원을 중심으로 이태원 무슬림 공동거주지의 초석이 마련됐고, 1980년대부터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 출신 무슬림 이민자들이 모이면서 지금의 거리가 형성된 것이다.

이슬람 거리에서 할랄 식당을 운영 중인 무자히드 씨(44)는 “한국어를 잘 못해도 편안함과 안전함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점이 이태원의 장점”이라고 밝혔다. 고향 친구들과 사원에서 기도를 드릴 수도 있고, 한국인 손님들로부터 한국 문화를 접할 수도 있어 이태원에서 거주하는 것이 좋다고. 이슬람성원을 중심으로 한 이 거리는 무슬림들의 신앙의 장소인 동시에 다양한 문화를 이어주는 교두보로 기능하고 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이화시장길’이란 팻말이 놓인 골목. 이 거리는 어느새 이화시장길보다는 이제 ‘아프리카 거리’나 ‘나이지리아 거리’로 불리는 곳이 됐다. 아프리카다운 독특한 경관이 형성돼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거리에는 아프리카인을 위한 음식점, 옷가게, 미용실이 성업 중이다. 특히 다루기 어려운 흑인의 곱슬머리를 전문적으로 다듬는 미용실은 아프리카 거리만의 특색이다. 이 거리에서 이발소를 운영하고 있는 P씨는 “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나름대로의 아프리카 공동체를 꾸려가고 있다”고 언급했다. 용산구청 통계에 따르면 이 골목에는 500명이 넘는 아프리카 출신의 이민자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어 이태원로 남쪽 다문화 커뮤니티들을 학군으로 삼는 보광초등학교를 찾았다. 운동장에는 피부색과 상관없이 다양한 인종의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현재 보광초등학교에는 총 86명의 다문화 가정 자녀가 재학 중이다. 이 학교에서는 한국어가 부족한 아이들을 모아 방과 후에 별도로 한국어 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각 나라의 의상을 입고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는 ‘어울림 한마당’이라는 행사 또한 열고 있다. 학내 안전사고와 학교 폭력을 감시하는 보광초등학교 보안관은 “우리 학교에서는 인종차별에 따른 왕따 현상은 전무한 편”이라며 이태원에서 다문화 교육이 효율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자랑스레 밝혔다.

이태원의 미래를 그리다

리차드 플로리다 교수(캐나다 토론토대 경영대학)는 저서 『도시와 창조계급』에서 “미래를 이끄는 도시는 역사적으로 인종과 문화가 얽혀 새로운 문화를 창출했다”며 “이민자에게 관용적인 지역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온전히 한국적 공간도 아니고, 외국을 고스란히 재현한 곳도 아닌 이태원을 ‘문화의 섬’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홍성태 교수는 “이태원에서는 한국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외래문화와 자생적인 문화의 융합을 보이고 있다”며 이태원의 다문화 공간적 특성을 설명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태원에서 진정한 다문화주의가 실현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이태원에서는 문화의 다양성을 보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곳에 뿌리내린 커뮤니티들 사이에 활발한 상호작용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송도영 교수(한양대 문화인류학과)는 “이태원의 각 커뮤니티들은 같은 공간을 이용하고는 있지만 상대 커뮤니티와의 일상적 충돌을 피하면서 외적인 평화공존만을 유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한국인 주민과 무슬림 사이에 소통이 부재한 것이 그가 꼽은 대표적 사례다. 현재 이슬람 거리에서는 한국인 주민들이 무슬림을 낯선 이방인으로 받아들여 서로 간 활발한 소통이 이뤄지지는 않고 있다. 이노미 연구원(성균관대 인문과학연구소)은 “이민자와 현지 원주민 간의 소통 부재가 정치적·사회적 대립의 갈등으로 표면화 될 수 있다”며 주의를 표했다.

다문화가 원활하게 공존하는 데 있어 정부 당국의 정책은 큰 영향을 미치지만 현재 서울시와 용산구의 도시계획은 다문화에 관한 피상적 접근에 그치고 있다. 용산구는 중장기발전전략에서 이태원 여행자 숙소 조성, 만국 공원 축제 등 문화의 경제적 관점에만 초점을 뒀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정책이 커뮤니티 간 단절을 심화시킬 것이라며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보다 실질적인 지원방안을 고민해야할 때라는 것이다. 2005년 설립된 경기도 안산시 외국인 주민센터는 다문화정책이 이민자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준 대표적 사례다. 이 주민센터는 외국인들을 위해 의료·복지사업을 여는 것은 물론 커뮤니티 간 스포츠 행사를 열어 지역 사회의 화합을 도모하고 있다. 이민자들이 많은 안산시의 특성을 반영해 지어진 센터가 이들이 보다 수월하게 정착하고 자신들의 문화를 보존할 수 있도록 톡톡히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앙리 르페브르는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비록 이민자일지라도 도시 구성원으로서 도시가 제공하는 편익을 누릴 권리, 도시 정치와 행정에 참여할 권리, 자신들이 원하는 도시를 만들어갈 권리”가 있다고 일갈했다. 이태원에서도 이민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내세울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태원에 퀴어를 허하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카스트로 거리는 세계적인 퀴어의 수도로 불린다. 이 거리는 최초에는 상업지구였으나 세계 2차 대전 이후 동성애 명목으로 해고된 미군들이 모여들면서 퀴어 거주촌이 됐다. 이 지역은 미국 최초의 퀴어정치인 하비밀크를 하원의원에 당선시키며 퀴어 운동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최근 이태원에서도 성적 취향으로 소외받아온 퀴어들이 둥지를 틀었다. 서울대 성적 소수자 동아리(QIS) 대표 로마 씨는 “현재 이태원은 한국에서 게이클럽이 유일하게 있는 곳으로 주말이면 수백 명의 게이들이 모인다”고 말했다. 성적 소수자들의 커뮤니티가 한국에도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퀴어, 이태원에 깃발을 꽂다

소방서길을 따라 아프리카 거리를 지나면 나오는 언덕길은 일명 ‘게이힐’(사진). 이 길에는 게이바들이 밀집돼있다. 평일 낮에 이 거리는 텅 빈 골목길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업소가 주말 오후 8시부터 문을 여는 까닭이다. 토요일 새벽 한시, 나지막한 언덕길에는 영업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레인보우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남색이 빠진 여섯 색으로 이뤄진 이 레인보우 깃발에는 성적 다양성을 아우르자는 성적 소수자들의 함의가 깃들어있다.

‘게이’힐이라는 이름과 달리 게이힐의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기에는 큰 어려움이 있었다. 게이힐에는 미디어에서 주로 노출되는 여성적인 남성들만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로마 씨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근육미를 과시하는 게이들은 물론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게이들도 있다”며 “‘게이는 여성스럽다’라는 인식은 게이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편견”이라고 전했다. 게이뿐만 아니라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또한 이 길의 구성원이다. 거리에서 만난 레즈비언 P씨는 “게이친구들, 일반친구들과 다함께 이태원에 놀러왔다”며 “퀴어에 편견만 없다면 이태원에서는 게이, 레즈비언 등 성적 취향에 따른 구분 없이 모두가 어울려 지낼 수 있다”고 밝혔다. 성적 취향도 생물학적 성별도 이 거리에서만큼은 중요하지 않은 잣대인 것이다.

새벽 두시 반쯤 게이바 Q에서 여자 아이돌 음악이 흘러나왔다. 노래에 맞춰 바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거리에 있는 사람들도 다 같이 군무를 췄다. 게이 L씨는 “이태원은 ‘넌 남자니까’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던 금기가 단번에 사라지는 곳”이라며 “어떤 행동을 해도 억압을 느끼지 않아 이태원을 자주 찾는다”고 말했다. 트랜스젠더 K씨 역시 “일반 사회에서 나의 존재는 그저 조롱거리일 뿐이지만 그래도 이태원에서는 불편한 시선 없이 거리를 다닐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태원에서만 사회의 생물학적 구분에 구애 받지 않고 스스로가 자신의 몸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영역에 속해 있지 않은 소수자들이지만 이태원은 그들의 ‘몸’을 자유로이 드러내며 사회 주류적 시선을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결정할 수 있는 대안적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사진: 주현희 기자 juhieni@snu.kr


게이힐의 내일을 말하다

일각에서는 게이힐에 술집, 클럽을 제외한 퀴어 문화가 없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태원의 퀴어 커뮤니티가 유흥문화에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게이바를 운영 중인 B씨는 “이성애가 중심적인 사회에서 퀴어들이 데이트를 즐기면 따가운 눈초리가 따라온다”며 “퀴어들은 결국 술집처럼 이목을 덜 끄는 장소를 찾을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2004년에 이르러서야 청소년 유해매체물 심의기준에서 ‘동성애’가 삭제된 점에서 알 수 있듯 퀴어문화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각은 여전히 편향돼 있다. 동성애자들의 행동반경이 이태원과 같은 다문화 공간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런 사회에서 퀴어들에게 게이바란 술집 그 이상의 공간적 의미를 갖는다. 질 발렌타인 교수(영국 리즈대 지리학과)는 저서 『사회지리학』에서 “퀴어 술집은 도시 내에 거주하는 퀴어의 사회적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곳”이라며 유흥 공간 그 이상의 퀴어 술집의 특성을 설명했다.

현재 이태원에서는 단순히 유흥문화를 즐기는 것에서 벗어나 진정한 퀴어 커뮤니티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올해 13주년을 맞이한 퀴어문화축제에서는 매년 대미를 장식하는 퀴어퍼레이드를 종로 부근에서 시작해 이태원에서 마무리하고 있다. 게이 M씨는 “아직 미미하지만 몇몇 커플들이 이태원에 거주하기 시작했다”며 퀴어 거주지역으로서의 이태원의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태원에 퀴어들의 커뮤니티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민들 또한 가까운 곳에 퀴어가 있을 수 있음을 상기하게 됐다. 로마 씨는 “이태원이라는 가시적인 공간을 통해 퀴어들은 ‘우리는 여기 있다’라는 메시지를 사회에 전달한다”고 밝혔다. 이태원에서 진정한 퀴어 커뮤니티, 나아가 진정한 다문화주의가 실현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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