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이라는 지명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1986년 한글학회에서 발간한 『한국지명총람』에 따르면 ‘이태원’이라는 지명에는 크게 두 가지 유래가 존재한다. 먼저 배나무 이(梨)와 역원(驛院)의 원에서 따온 이태원(梨泰院)이라는 설이 있다. 이태원은 한양 사대문 밖에 위치한 4대 역원 중 하나로, 유난히 배밭이 많았다는 데서 이러한 이름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한편 다를 이(異)와 태반 태(胎)를 사용한 이태원(異胎圓)이라는 유래도 있다. 여기에는 임진왜란 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일본인, 임진왜란 중 일본군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성과 그 여성들이 낳은 아이들이 모여 살던 동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어원에 따라 의미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태원은 역사적으로 이방인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모여 살았던 공간이었다. 근래에 들어서도 이러한 사정은 마찬가지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남대문과 용산 일대에 일본군의 전초기지가 세워지면서 이태원 지역에도 일본군이 주둔하게 된다. 또 광복 후에는 한국에 주둔한 미군이 기존 일본제국 병영의 일부를 이용하면서 이태원 부근에 자리를 잡았고, 이는 한국전쟁 을 거치며 현재의 미군부대로 이어졌다. 특히 미군의 외박과 외출이 허용된 1957년부터 이태원에는 기지촌과 그를 둘러싼 문화가 급속하게 생성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이태원은 ‘텍사스촌’이라 불리며 자연스레 미국 문화 소비의 공간으로 변화해 갔다. 이태원의 메인 거리인 이태원로를 중심으로 미군 군인들을 고객으로 한 큰옷, 큰신발 시장이 형성됐고, 미국 남부에서 흑인들이 즐겨 듣던 재즈를 감상할 수 있는 재즈바도 역시 한국에 첫선을 보였다. 또한 1957년 ‘유엔클럽’을 시작으로 이태원에 클럽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미군을 고객으로 한 유흥업소가 이태원에서 하나 둘씩 영업을 시작하면서 이태원은 미국 현지의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로 알려지게 됐다.

미군을 대상으로 한 매춘 여성들 또한 이태원을 중심으로 몰려들었다. 1960년대 말까지 미군을 대상으로 했던 매춘업소는 현재 녹사평역 일대 해방촌에서부터 이태원로에 이르는 넓은 권역에서 성행했다. 허름한 주점들이 늘어선 후커힐에 아직도 그 흔적이 일부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태원 지구의 자체적인 노력으로 근래에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해밀턴 호텔과 이태원 시장을 따라 이태원에 미국인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쇼핑지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는 자원이 부족하고 값싼 인력이 풍부했던 한국에서 당시 가공무역에 주력했던 데서 기인한다. 정부에서 보세제품수출정책을 추진하면서 이태원 일대에 미군을 고객으로 하는 양복점, 유기점, 신발가게, 구둣방, 보세점이 생겨났고, 뒷골목에는 수출용 가내 공장들이 들어서게 됐다. 이렇게 형성된 이태원 상가 일대는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 등의 국제행사를 통해 외국인들에게 알려지면서 호황을 누리게 됐다.

이태원에 자리잡았던 보세상권은 1990년대 후반 불황으로 규모가 축소됐지만 대신 소수자 집단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가장 큰 변화로는 퀴어 문화가 이태원에 자리를 잡은 것을 꼽을 수 있다. 1996년 이태원 최초로 게이바 ‘터널’이 문을 연 이후 서구식의 게이바들이 이태원에 점차 들어서게 됐다. 예로부터 미군을 중심으로 서구식 문화가 자리를 잡아 다른 지역에 비해 문화 장벽이 낮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1976년 이슬람 성원의 건립과 상대적으로 싼 지가를 기반으로 무슬림들도 정착하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이태원은 경직된 한국 사회의 차가운 시선을 벗어날 수 있는 해방구로서의 가능성을 엿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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