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중반까지, 한국 사회에 만연한 성별 권력 불균형은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부 고려대 남학생들은 이화여대 축제에 난입해 행패부리는 것을 오랜 전통으로 계승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이대생들이 신체적 부상을 입기도 했다. 몇몇 대학에서는 감히 후배 여학생이 맞담배를 피운다는 이유로 복학생이 폭력을 가하기도 했다. 더 놀라운 점은 이러한 사건들이 가해자가 비난받는 것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성대 여성의 논쟁으로 비화됐다는 것이다.

1993년 서울대 교수의 조교 성희롱 사건으로부터 촉발돼 9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여성주의 운동은 대학 공동체의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이는 권력관계에 대한 정교한 인식에 기인했다. 성별 권력의 차이가 ‘사생활’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주목하면서, 여성들은 일상적으로 체감하던 모순을 비로소 언어화시킬 수 있었고 바꿔나갈 수 있었다. 그 결과 대학에서는 기존 사회와는 다른 가치와 질서가 존중받을 수 있었다. 비록 시공간적으로 대단히 임시적이고 제한적일지라도, 대학은 사회를 바꿔나가는 희망의 근거지가 됐다.

그런데 공동체의 진보적 변화를 이끌어냈던 실천들이 공동체의 원칙으로 인정되면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점차 그 힘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성주의 내의 다양한 논쟁들이 공유되지 못한 채, 특정한 논리만이 올바른 여성주의이며 이견은 여성주의 일반에 대한 공격으로 치부되는 듯한 모습도 발견된다. 이러한 흐름은 이데올로기적 차원을 특히 강조하는 그룹과 결합되면서 이론에 편향된 대장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네들 특유의 피해자 중심주의의 포괄적 적용 속에서, 약자의 시선으로 논의를 시작하려는 노력들은 약자의 감정만이 논의되는 상황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 결과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원칙은 구성원들이 점점 더 많이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난해하고 복잡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처럼 논쟁의 이른 종결은 오히려 더 큰 논쟁을 불러오고 있다.

최근 피해자 중심주의가 희화화되고 더 나아가 여성주의에 대한 비아냥이 대중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일베로 대표되는 극우적 남성들의 공격은 여성주의가 이뤘던 성과들을 모두 되돌리려 한다. 이러한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주의자들이 겪을 어려움은 감히 짐작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럴수록 여성주의에 대한 공격과 여성주의를 위한 토론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부정의에 대한 투쟁과 자신에 대한 성찰을 구분하는 것은 어쩌면 진보를 꿈꾸는 모든 운동의 숙명이리라. 지금 상황이 아무리 암울해 보일지라도 지난 십여년간 얼마나 많은 변화들이 이뤄졌는지를 잊지 말자. 언제나 그대들의 자신감과 성찰이 함께 하길.

김경근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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