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센터 직원 A씨는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는 증상을 겪고 있다. 전화가 올 때마다 고객들로부터 쏟아지는 폭언과 성희롱, 욕설을 감당하다 보니 생긴 증상이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가슴이 답답하거나 숨이 차는 이 증상은 공황장애라고 하는 정신질환이다. A씨는 고객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응대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이 같은 증상이 심해졌고 결국에는 직장을 그만둬야만 했다.

산업재해의 사각지대, 정신질환

직업성 정신질환이란 업무상의 요인으로 인해 나타나는 정신질환을 일컫는 개념이다. 업무상의 요인으로는 A씨와 같은 감정노동, 과도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 해고 불안 등의 다양한 이유가 해당되며 그 결과로 나타나는 정신질환은 우울증, 공황장애, 정신분열증 등이 있다. 대표적인 업무상 정신질환으로는 서울도시철도 기관사의 예를 들 수 있다. 2007년 가톨릭대 병원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서울도시철도 기관사들은 일반인보다 우울증은 2배, 외상후 스트레스는 약 4배, 공황장애는 무려 7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불규칙한 교대제로 인한 불안과 생활 장애, 사고의 두려움 등 업무 과정에서의 스트레스가 극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업무상의 문제로 정신질환을 앓는다고 해도 이를 산업재해(산재)로 인정받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나라의 근로법은 사고나 물리적 재해 등에 의한 질병의 범위와 처리 기준은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지만 정신질환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준이나 지침이 없기 때문이다.「근로기준법 시행령 [별표5]: 업무상 질병과 요양의 범위」는 업무상 질병을 △무겁고 힘든 업무로 인한 근육관절의 질병 △납 합금 또는 화합물에 의한 중독 등과 같이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그 종류는 총 37가지에 이른다. 그러나 우울증, 정신분열, 공황장애 등의 정신질환은 업무상 질병으로 명시돼있지 않다. 정신질환을 판정하는 기준과 업무와의 연관성을 파악하는 절차 역시 없다.

따라서 정신질환 산재 판정은 담당 기관인 근로복지공단 산하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서 자의적이고 비체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노동보건연대 이상윤 정책국장은 “지역별 위원회들의 판정 절차가 다 제각각이기 때문에 거의 유사한 조건에서 일어난 질환이라도 판결이 다른 경우가 많다”며 “심지어 사실 파악에 있어 필수적인 정보 등이 누락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2005년 하이택알씨디코리아 노동조합원 13명이 사측의 감시와 탄압에 의한 정신질환을 산재 신청했지만 전원 불승인 처리됐다. 자료 공개 결과 근로복지공단은 노조 측이 제출한 사측의 감독 자료 등을 별다른 이유 없이 판결 과정에서 제외했으며 근로복지공단 자체의 사실관계 조사는 아예 수행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희자 세명공인노무사사무소 소장은 이를 근로복지공단의 재정 안정성과 연결해 분석하기도 했다. 그는 “근로복지공단이 산재처리를 적게 할수록 재정 안정성이 확보되기 때문이라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며 “근로복지공단은 이를 부인하고 있지만 여전히 납득할만한 이유 없이 불승인이 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고 말했다. 실제 근로복지공단의 「2008년 7월〜2010년 5월 질판위 판정현황」 자료에 따르면 정신질환의 산재 불승인률은 2008년 68.4%, 2009년 74.5%, 2010년 83.3%로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제도화, 충분히 가능하다

전문가들은 정신질환의 개념이 모호하며 업무간의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편견이라고 말한다. 이희자 소장은 “우울증, 공황장애, 스트레스 등은 의학적으로 그 존재가 증명된 질병”이라며 “업무상 스트레스와 금전관계, 가족·친구관계 등 업무 외적인 스트레스를 파악하는 것을 통해 인과관계를 밝히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본의 경우 지난 1999년부터 정신질환을 산업재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질병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업무상 요인과 업무외적인 요인을 고려해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법적인 매뉴얼을 두고 있다. 일본 후생노동성의 지침에 따르면 업무상 질병은 우울증, 스트레스 반응 등의 ‘신경성 장애’로 규정된다. 이 질병이 발병하기 대략 6개월 전에 객관적으로 정신장애를 발병시킬 수 있는 업무상의 심리적 부담(스트레스)이 인정돼야 한다. 심리적 부담의 정도는 사고나 재해의 체험, 업무의 실패 경험, 업무의 양과 질의 변화 등 다양한 항목을 통해 점수화될 수 있도록 평가표가 법률상에 제시돼 있다. 마지막으로 직장 외의 심리적 부담이 없어야 하며 이것 역시 법률에 제시된 평가표를 통해 점수화돼 표시된다. 이에 일본에서 2010년 산재로 인정된 정신질환은 총 308건으로 1년에 22건인 한국의 15배에 달한다.

미국과 영국 역시 주별 산업재해 보상보험이나 산업의학 등에서 정신질환을 명백한 직업성 질환으로 정의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1999년 이후로 전체 산업의학전문의의 60~70%가 참여하는 정신질환 감시체계 SOSMI(Surveillance of Occupational Stress and Mental Illness)가 있으며 2001년 기준 총 771명의 정신과 의사들이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이희자 소장은 “경쟁적인 현대 사회에서 노동 관련 정신질환은 점점 광범위해지고 심각해지는 문제”라며 “정신질환을 하루빨리 산업재해보상법에 구체적으로 규정해 노동자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사회보장제도의 취지를 살려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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