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 이 책] 이 폐허를 응시하라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에 쓰나미를 동반한 대지진이 일어났다. 이 비극적인 소식은 뉴스와 SNS를 통해 생생하게 전해지며 전세계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런데 이는 단순한 자연재해로만 끝나지 않았다. 쓰나미가 후쿠시마의 원전을 강타하며 ‘방사능 유출’이라는 2차 피해까지 발생한 것이다. 게다가 방사능 물질의 유출로 일본은 물론 한국, 중국까지 비상 상태에 놓였다. 다만 주변국의 우려가 간접적인 피해에 대한 ‘공포’의 차원이었다면 매일 수천구의 시신을 처리해야 하는 재앙 속에 놓인 일본의 상황은 ‘절망’ 그 자체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말 당시 일본에는 절망만 가득했을까? 이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의 저자 레베카 솔닛은 재난이 오로지 절망만을 안겨 주는 것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 폐허를 응시하라』 출간 이후 한 인터뷰에서 “자연재해에서 문제는 자연현상이 아닌 사회현상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저서를 통해 샌프란시스코 대지진부터 허리케인 카트리나까지 다섯 가지의 재난을 살펴보며 대중매체에 의해 조작된 재난현장의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가령 자연재해를 다룬 영화에서는 재해를 미리 예측한 과학자들과 이 예측을 대중에게 발표하는 것을 막으려는 인물의 대립구도가 자주 등장한다. 발표를 막으려는 자는 그로 인해 생길 ‘공황’ 상태를 미리 걱정하며 정보의 유출을 막는 것이다. 실제로 재난 상황이 예고된 이후 그들의 예상대로 영화 속에는 자동차로 도로가 가득 메워진 장면과 부족한 식량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식량을 차지하기 위해 살인도 불사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재난이 발생하면 혼자만 살려는 개인들의 이기심으로 도시가 쑥대밭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여러 재난 현장을 다녀본 저자는 “어떤 재난 속에서도 영화에 재현된 것과 같은 심각한 공황은 발생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공황’에 대한 기존의 인식은 어디에서, 그리고 왜 생기게 된 것일까. 저자는 재난으로 인한 공황이라는 개념은 재난 이후 기존 체계가 흔들릴 때를 대비해 지배계층들이 만든 인식이라고 설명한다. 유사한 예로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하늘이 지도자를 결정한다는 ‘천명(天命)’이라는 개념이 쓰였다. 그런 인식을 가진 동양에서 재난은 지도자의 천명이 다했다는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재난 이후 지배계층들은 자신들이 통치해야 할 정당성을 찾아야 했다. 그런 그들에게 재난으로 사회가 ‘공황’에 처할 수 있다는 사실은 좋은 구실이 됐다. 지배계층은 재난 이후 사람들이 공황상태에 빠지기 때문에 자신들이 나서서 처리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온 것이다.

또한 저자는 이러한 지배계층의 논리와 대중매체에 의해 조작된 재난 상황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재난 이후 시민들의 사회파괴적 행동이 나타나게 됐다고 지적한다. 허리케인 카트리나 이후 주민들은 혼란을 틈타 재산을 약탈하려는 자들로부터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자경단’을 구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주민들의 걱정과는 달리 재난 복구 기간 중 도난 신고는 한 건도 없었다. 그런데도 자경단은 재난 복구 기간 동안 수백명의 ‘흑인’들을 사살한다. 자경단은 왜 흑인들을 사살했을까. 저자는 ‘대중매체의 영향’이라고 설명한다. 텔레비전에서는 흑인들이 백인들을 공격하는 장면을 연속으로 방영하며 마치 흑인들이 재산을 약탈하고 백인들을 해칠 수 있다는 듯이 과장했다. 이웃 간의 살육이라는 극단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은 대중매체에 의해 조장된 재난 상황에 대한 공포와 인종주의가 결합하면서 일어난 결과였다.

저자는 “‘흑인 살인’을 저지른 백인 자경단원들이 자신들의 살인적 폭력을 문명을 수호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행위로 착각하고 있다”며 오히려 약탈과 살인을 일삼는 무리는 백인 자경단원들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또한 자경단원들이 흑인들에게 폭력적으로 반응하도록 만든 텔레비전 방송에 대해 ‘정보에서 불이익을 보았다’고 비판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조작된 공황과 함께 재난현장에 대해서도 모두가 잘못 알고 있다”고 고발한다. 그렇다면 재난 현장은 실제로 어떤 모습일까. 역설적이게도 저자는 재난 현장을 ‘재난 유토피아’라 부른다. 더불어 현장에서 시민이 ‘선택한’ 무정부상태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운영되는지에 대해 역설한다. 멕시코시티 대지진 당시 도시의 관료제도는 평소의 몇배의 업무 과중으로 마비됐다. 따라서 시민들은 정부의 도움을 기다릴 수 없었으며 스스로 필요한 것을 구해야 했다. 예를 들어 재난 직후에는 주변 사람들을 구할 구조대가 필요했으나 시간이 지연되자 시민들이 구조팀을 조직했고 먹을 것이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급식소를 운영했으며 집이 무너진 사람들은 거주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주거권 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일들이 거듭되면서 시민들은 자신들의 권리와 권력을 인식하게 됐으며 참여와 연대의 기쁨도 알게 됐다. 더 나아가 시민들은 그들의 힘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고 그들의 힘으로 문제들이 해결되는 모습을 봤다. 결국 재난은 시민들에게 스스로 ‘시민사회’의 힘을 깨닫게 한 것이다.

재난에 대한 저자의 주장들은 기존의 생각을 깨며 신선한 충격을 준다. 레베카 솔닛은 재난을 통해 “대부분의 인간이 연대와 참여와 이타주의와 목적의식을 얼마나 간절히 갈망하는지를 보았다”고 말한다. 나아가 저자는 “개인화되고 사적인 생활이 중심이 된 현대 후기 산업화 사회의 일상생활이 사실상 재난 상황과 다름없게 됐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시민들이 스스로의 갈망을 평소에도 인식하는 것을 통해 재난 상황에 처한 시민들이 그러했듯 연대와 참여, 이타주의와 목적의식이 분명한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어떤 사람을 잘 알기 위해서는 힘든 상황에서 그 사람의 행동을 보라’는 말이 있다. 재난의 상황에서 협동과 사랑이 생긴다면 인간의 본성에는 협동과 사랑이 잠재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재난 유토피아’를 통해 자신의 마음속의 ‘유토피아’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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