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윤 시간강사
(경제학부)
개강이다.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계획과 희망에 부푼, 다른 누군가에게는 취업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이 내리누르는 한 학기가 시작되었다. 매학기 같은 수업을 진행하는 시간강사의 입장은 어떨까? ‘정치경제학입문’(맑스주의 경제학의 기초를 다루는 과목이다)을 강의하다 보면 학기초마다 예외없이 많은 질문에 맞닥뜨리게 된다. 주류경제학과는 전혀 다른, 어쩌면 정반대되는 시각으로 자본주의 경제를 분석하는 방식이 도대체 익숙하지 않아서 나오는 질문이 대부분이지만, 개중에는 이 낯선 이론에 대한 의구심과 폄하, 때로는 적대감까지 은연중에 묻어있기도 하다. 주류에서 배제된, 그래서 자신이 이제까지 접해본 적 없는 이론과 사상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물질적 이해관계를 다루는 학문이니만큼,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다는 식의 형식적 관용조차 허용되지 않는 경제학의 ‘계급성’을 가장 큰 원인으로 돌릴 수도 있겠다. 맑스가 말했듯이, “경제학이 취급하는 문제의 독특한 성격 때문에, 사람의 감정 중에서 가장 맹렬하고 가장 저열하며 가장 추악한 감정—즉 사리사욕(私利私慾)이라는 복수의 여신—이 자유로운 과학적 연구를 저지하는 투쟁 마당에 들어오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분석이 “기존의 소유관계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는 수업내용이 부담스럽고 거부감이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 나아가 내가 누구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상의 모습이 전혀 다른 형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전혀 다른 판단을 요구한다. 그래서 스스로가 (주류)경제학에 정통하다고 생각할수록, 자신이 이제까지 살아왔고 앞으로 살아나갈 궤적에 대한 자부심과 확신이 클수록, 맑스의 이론은 뭔가 불온하고 섣불리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위험한 것으로 느껴지게 된다. 이른바 ‘계급적 본능’이 검열기능을 발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단지 그것 때문일까? 어쩌면 그 밑바닥에는 익숙한 것과 헤어지기 싫어하는 습성, 새롭고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 지난 방학은 내게는 새로운 시작이기도 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서로 마주 보았던” 사람과 “손잡고 함께 나아가기로” 한 지가 아직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았다. 결혼을 결정하기까지, 그리고 결혼식 날짜를 정하고 나서도 여전히 “서툴고 떨렸던” 것은 평생 당연하게 살아왔던 방식을 떠나 내가 잘 모르는 세계에, 그것도 나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들어간다는 부담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나름 미리미리 준비한답시고 했는데도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다음에도 아직까지 매일 실수투성이다. 청첩장에 “부족함을 사랑으로 채우겠다”고 써놓은 것이 무척 다행으로 여겨질만큼. 일상은 얼핏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듯하지만, 분명 많은 것이 바뀌었다. 나이드신 어머님 슬하에서 이제껏 면제받았던 집안일을 분담하고, 분명 같은 초보인데 나보다 더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에게 고마워하다가도, 작은 것들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또 투닥거린다. 그러면서 서로가 아주 많이 다르다는 것을 계속 확인한다. 수십 년을 다른 환경, 다른 사람들과 살아왔으니 당연히 그러려니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켠의 불편함은 쉬이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불편함이 싫다면 서로 변해야 한다. 자신이 익숙했던 방식을 버리고 상대방이 나은 점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것과 단절할 것을 요구한다.


새로운 일상의 불편함이 싫고 두려워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을 꺼리는 사람은 드물다. 곧 첫 수업시간이 되면 학생들에게 그동안 배워왔던, 길이고 빛이고 진리라고 믿어왔던 것들과 단절하라고, 최소한 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라고 말할 것이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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