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은 바야흐로 새학기가 시작되어 학부-대학원 학생들에게 새로운 주기가 시작되는 시기이다. 특별히 올해는 새 정부의 임기가 시작되는 시기이다. 평소 특별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더라도 19대 대선과 새 정부 출범은 관심갖지 않을 수 없는 큰 사건임이 분명하다.

지난 2월말. 대통령의 퇴임식과 취임식이 있었다. 정확히 그 즈음, 영화 『남쪽으로 튀어』가 극장에서 조용히 퇴장하였다. 영화판에서 영화의 흥행은 퀄리티와 상업성(재미)도 중요하지만, 상영관 확보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해볼 때, 『남쪽으로 튀어』의 종영에 일말의 정치적 영향이 있지 않나 의심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근거없는 음모론은 거두기로 하고, 비록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 영화는 코믹하고 엉뚱한 상황설정과 함께 ‘국가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국가와 개인의 관계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2시간의 영상에는 대한민국이란 공간에서 벌어지는 온갖 부조리함과 개인에 대한 촘촘한 통제가 총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주인공 최해갑(김윤석 분)은 20대에 국가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였으나, 바뀌지 않는 현실에 실망하고, ‘국가’라고 하는 비자발적으로 가입된 조직으로부터의 온전한 독립과 자유로운 삶을 갈망하며 살아간다. 소위 386세대가 일부는 현실정치로 진출하고, 대다수는 현실에 순응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에 비해 최해갑 부부는 현실에 순응하지는 않지만, 투쟁이 아닌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평화롭고 자유롭고 즐거운 공동체를 꾸려가고자 고군분투한다. 얼핏 수많은 386 후일담의 변주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보다 부조리함이 만연한 국가에서 ‘자유로운 개인으로 살아남기’의 고됨을 보여주고 있다.

국가관, 국가는 무엇이어야 하며, 국가와 개인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회과학자들의 오랜 논쟁거리였다. 국가와 개인을 계약적 관계로 설명하는 시각, 지배계급의 도구로서 국가의 존재를 투쟁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 시장이 하지 못하는 공적업무를 담당케 하는 공간으로 보는 시각이 등이 우리가 배운 주요 이론이다. 그런데 국가와의 정당한 계약이 지켜지지 않을 때, 투쟁하기에는 너무 버거울 때, 국가와의 관계에서 pause를 누르고 개인의 자유를 좇는 것은 그토록 불온한 행위인 것일까.

지금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80년대에서 90년대 초반의 풍요로운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부터 치열한 경쟁 하에 자랐을 것이다. 대개는 이에 순응하고 경쟁에서 살아남아 높은 고지를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살아간다. 그 중간중간의 휴식으로 올림픽과 월드컵같은 ‘나라사랑’ 이벤트가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고, 70~80년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 레토릭, 열심히 노력해서 ‘뛰어난 인재’가 되어 '선진국'에 도달하자는 훈훈한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그렇지만 경쟁에 경쟁을 거듭하여 올라간 꼭대기에는 무엇이 있을까. 선진국민이 되어 ‘더 잘산다’는 것은 과연 어떤 삶인가. 포올러스의 소설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애벌레는 ‘밟고 올라가느냐, 밟히느냐의 세상’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뭔가 보다 좋은 것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끝없이 노력한다. 하지만 애벌레 이야기의 결론은 모두가 알고 있는 대로이다.

새 학기를 시작하는 바쁜 찰나에, 비록 남쪽으로 튈 수는 없지만 온전한 자신만의 삶의 방향을 그려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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