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들의 정치 참여에 대한
대학의 제멋대로 이중 잣대
본연의 사회적 역할 위해서는
정권에 눈치보기 지양해야

정진욱 부편집장
개강을 맞은 캠퍼스는 새내기들의 기분 좋은 설렘과 완연한 봄기운으로 유난히 따뜻한 듯하다. 유달리 추웠던 겨울에 움츠러들었던 관악도 이제는 새내기들의 밝음과 들뜸으로 가득 차 있다. 어느덧 관악에서 세 번째 봄을 맞는 ‘헌내기’가 됐지만 새내기들의 모습에 괜스레 옛날 생각이 나는 요즘이다.

처음 관악에 발을 내딛던 그날 느꼈던 기대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듣고 싶은 수업을 골라 듣는 것도, 그동안 해보지 못했던 동아리에 가입하는 것도, 선배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사회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모두 대학의 낭만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대학 생활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대학(大學)’이라는 말이 뜻하듯 보다 큰 배움의 세계를 맛볼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공부가 ‘나’라는 개인을 위한 것이었다면, 대학 시절의 배움은 개인을 넘어 개인이 발 딛고 살아가는 사회와 그 구성원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은 사회적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실행할 수 있는 용기를 길러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막상 대학을 다녀보니 나의 기대가 ‘순진’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학들은 학생들에게 사회적 역할을 다하라고만 할 뿐 현실에서는 사회적 문제를 회피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왔다. 최근 정치외교학부 김세균 교수의 명예교수 심사 탈락 소식이 대표적인 예다. 교수의 학문적 업적보다 정치적으로 행동했던 사실 자체가 명예교수 심사 과정에서 중요하게 고려됐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교수의 정치적 견해가 옳은지 그른지는 차치하고서라
도 ‘학문의 전당’인 대학에서 나와서는 안될 우려다.

그런가하면 일부 대학들의 경우 학자의 양심이 아닌 개인의 영달을 위해 자리에 연연하는 이른바 ‘폴리페서(polifessor)’들에 대해서는 눈감아주기도 했다. 선거 기간 대학들은 여러 교수들이 총선에 출마한다는 이유로, 대선 주자의 캠프에 참여한다는 이유로, 행정부 관료로 차출됐다는 이유로 교수직을 ‘휴직’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낙선하거나 관료 임기가 끝나면 다시 학교로 돌아올 수 있는 여지를 대학이 스스로 열어둔 것이다. 어떤 교수는 정치 활동을 하다 학교로 돌아올 수 있고, 어떤 교수는 정치 활동을 했다고 해서 불이익을 받아야 할 수도 있는 ‘이중적’ 상황이 대학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 나아가 일부 대학은 ‘교수의 정치인화’를 넘어 ‘정치인의 교수화’를 추진하고 있다. 정·관계 인사의 석좌교수 임용은 폴리페서의 또 다른 형태를 양산하는 것이다. ‘돈 봉투 파문’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던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사면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대학의 석좌교수로 임용됐다. 학술적 업적이나 성과가 아닌 학교의 위상을 높이거나 ‘정부에 잘 보이기’ 식의 ‘정치적’ 목적으로 교수 임용이 이뤄진다면 학교는 더 이상 학문을 바탕으로 사회에 건전한 목소리를 내야 하는 본연의 사회적 역할을 다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대학들이 교수들의 정치 참여에 이중적 잣대를 들이대며 정권의 눈치를 보는 듯한 오늘날의 세태를 보고 지금 캠퍼스를 거니는 새내기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으며 무엇을 배워야할까. 입학식과 졸업식 축사로 빠지지 않는 ‘사회적 역할을 다하라’는 공허한 외침은 그럴듯한 허울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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