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을 사로잡은 작곡가, 박시춘
대중을 사로잡은 작곡가, 박시춘
  • 대학신문사
  • 승인 2013.03.10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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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작곡가 박시춘(朴是春, 1913~1996) 탄생 100주년

올해는 작곡가 박시춘이 탄생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비록 그의 이름은 모르는 이들도 “아~ 신라의 밤~이~여”와 같은 그의 대표곡은 가사만 봐도 음이 떠오를 것이다. 이외에도 「낭랑 18세」, 「굳세어라 금순아」, 「봄날은 간다」 등은 세대를 초월해 현대 대중들에게도 익숙하다. 그의 영향력은 가요는 물론 대중문화 전반에도 걸쳐있기 때문이다. 박시춘이 작곡한 곡들은 가수이자 작사가인 故반야월의 표현처럼 ‘흘러간 대중가요가 아니라 흘러온 대중가요’인 것이다. 『대학신문』에서는 대중가요의 탄생과 전개과정에서 박시춘이 행한 역할을 살펴보고 한국 대중음악 발전을 돌아봤다.

 

삽화: 선우훈 기자 mrdrug@snu.kr

 

대중가요의 탄생과 박시춘의 역할

1920년대 대중가요의 발전은 레코드와 유성기 사용의 확대 등 대중매체의 보급과 발맞춰 이뤄졌다. 레코드판은 구전이 주를 이루던 국내 음악 시장이 팽창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한다.
 

그러나 1920년대는 음악사적으로 신민요, 만요*, 트로트, 재즈 등의 본격적인 대중가요가 잡가, 판소리 등 전통음악과 병존하던 과도기이기도 하다. 장유정 교수(단국대 교양기초교육원)는 저서 『오빠는 풍각쟁이야』에서 “대중가요는 전통가요와 끊임없이 교섭하고 부침하다 1930년에 이르러서야 대중가요가 전통가요보다 우위를 점한다”고 설명한다. 대중가요와 전통음악 모두 레코드판을 통해퍼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세대 작곡가들은 트로트, 신민요, 만요 등 장르를 넘나들며 작곡 활동을 벌여 대중가요가 점차 음반 시장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데 일조한다. 동시대에 손목인, 김해송 등 쟁쟁한 작곡가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박시춘은 양적인 측면에서나 인기 면에서 두드러졌다. 장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그가 광복 이전 오케레코드에서 작곡한 곡은 241곡으로 확인되며 이는 같은 시대어느 작곡가보다 많은 양이다. 이준희 교수(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는 “박시춘은 1950년대까지는 작품 양으로나 질로나 그리고 인기로나 단연 독보적인 작곡가였다”며 박시춘이 대중가요 1세대 정착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말했다.
 

격동의 시대 속 변화하는 대중을 포착하다

데뷔 후 박시춘의 음악은 일제 치하, 광복 직후, 한국전쟁 등 시대상을 그대로 담아낸다. 그에게는 시대에 따라 대중의 취향이 달라지는 것을 감지하고 이에 맞는 곡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었다. 이 교수는 “당대 대중의 요구와 유행 사조를 어떤 것이든 자신의 특장으로 소화해낸 것이 진정한 그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며 박시춘의 성공 요인을 짚었다. 박시춘은 성공적인 대중예술은 대중의 취향에 따라 끊임없이 변해야한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안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시춘은 1935년 「희망의 노래」로 데뷔, 2년 후 히트곡 「애수의 소야곡」를 발표하게 된다. 「애수의 소야곡」은 잔잔한 멜로디 위의 기교 섞인 기타 곡조가 애절한 감상을 자아내고 체념의 정서를 담은 가사와 적절히 합을 이뤄 서정성을 극대화한다. 장 교수는 “일제 식민 치하의 상실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박시춘이 일제 치하 국민들의 정서를 포착한 점을 주목한다. 실제로 이 시기 박시춘은 「꼬집힌 풋사랑」, 「눈 오는 네온가」 등 서정적인 곡을 다수 발표하며 인기를 이어간다.
 

광복 후 박시춘은 민족적인 정서를 담은 「신라의 달밤」, 해방 후 기쁜 마음을 표현하는 활기찬 「럭키서울」 등을 대중들에게 선보인다. 「신라의 달밤」의 원곡은 일제시대 「인도의 달밤」이었으나 박시춘은 작사가 유호와 손잡고 신라를 배경으로 개사한 것이다. 박시춘의 행적을 연구한 박성서(대중음악평론가)는 “우리 것을 되찾겠다는 박시춘 선생의 의지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라고 평했다.또 「럭키서울」의 흥겨운 멜로디는 해방 수도의 들뜬 분위기를 잘 반영하며 흥행에 성공하기도 한다.
 

민족 최대의 비극이었던 6・25 전쟁 시기 박시춘은 군의 사기를 높이는 진중(陣中)가요와 전쟁으로 상처 입은 민중의 애환을 달래는 가요를 함께 작곡한다. 그는 「전우여 잘 자라」, 「승리 부기」 등 진중음악을 다수 내보이며 군의 군예대장으로 활동한다. 박 평론가는 “박시춘 가락은 진중가요를 창작한 이 무렵 힘차고 남성적으로 변화한다”며 “불과 몇 년 차이로 박시춘 음악은 시대상황에 따라변화하고 있다”고 평했다. 실제 당시 진중음악이 아닌 희망찬 주제의 음악인 「굳세어라 금순아」 역시 굵은 목소리와 관악기를 전면에 내세우며 미성과 기타 선율에서의 변화를 보여준다. 하지만 한편으로 박시춘 특유의 서정성을 잘 살려 전쟁 시기 가족과 헤어진 사람들의 아픔을 애수적인 가락으로 드러낸 「이별의 부산 정거장」 과 같은 곡도 발표한다.
 

정전 이후 박시춘은 영화음악계에 투신해 직접 영화사를 설립하고 자신이 제작하는 모든 영화에 주제곡을 넣는다. 「가는 봄 오는 봄」, 「오부자」 등 초기 영화들이 성공을 거두며 박시춘의 흥행시대가 이어지는 듯 했으나, 많은 투자를 한 영화 「장미의 곡」이 실패하면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마침 개봉일이 1960년 4・19 혁명일이어서 관객을 전혀 모으지 못한 것이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박시춘은 「돌지 않는 풍차」 등 음반을 내며 재기하고 「일자상서」를 통해 근대화로 흩어진 가족의 애환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박시춘은 70년대 마지막 상업음반을 끝으로 공식적인 음반활동은 중단한다. 이에 대한 이 교수는 “1970년대 이후 창작 역량이 힘을 다했기에 박시춘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중문화의 주춧돌을 마련하다

박시춘은 작곡가로서의 성취 외에도 대중가요, 나아가 대중예술의 기반을 세우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표적인 것이 광복 직후 레코딩 회사 ‘럭키레코드’를 세운 것이다. 광복 직후 일본 레코딩 회사가 거의 철수하면서 우리나라에는 레코드판을 녹음할 여건이 미비한 상태였다. 박 평론가는 “유호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박시춘 선생은 심지어 일본이 버리고 간 음반을 고물상에서 수집해 참기름 짜던 압축기에 눌러 판을 찍었다고 한다”며 대중가요 진흥을 위한 박시춘의 노력을 전한다. 당시의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낭랑 18세」, 「비 나리는 고모령」, 「신라의 달밤」 등 명곡들이 나왔으니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한국 대중가요의 발전은 훨씬 더뎠을 것이다.
 

또 박시춘은 주요 음악단체들의 협회장을 지내며 기틀을 다졌다. 1956년 대한레코드작가협회 회장을 맡으며 레코딩 업체의 권익보호를 위해 나선다. 이후 세워진 문화인 최대 단체인 한국연예예술인협회 이사장을 맡기도 한다. 이외에도 영상물등급심의위원회의 전신인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 부회장 및 상임위원,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부회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이런 이력은 그가 대중가요를 넘어 문화예술계 전체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 박시춘은 대부분의 직책을 내려놓는다. 큰 외부활동이 없던 박시춘은 작고하기 4년 전부터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었다고 한다. 하지만 박 평론가는 “작곡가 모임인 ‘한국가요작가동지회’에 참석하면 특유의 해박한 ‘풍류적 객담’으로 모든 이들을 즐겁게 했다고 전해진다”며 몸이 불편한 중에도 사람과 웃음을 버리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마침내 박시춘은 1996년 향년 84세로 눈을 감는다.
 

하지만 그의 가요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생활 주변에 남아있다. 「낭랑 18세」, 「굳세어라 금순아」 등은 드라마 제목으로, 「비 내리는 고모령」은 힙합 편곡으로, 「승리 부기」와 같은 노래는 영화의 OST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시춘의 대표곡들은 이미 대중가요의 고전이 되었지만,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만요(漫謠): 1930년대 발흥했던 희극적 대중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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