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화화되기도 한 일본 소설 「용의자 X의 헌신」은 발상의 전환을 통해 여느 추리소설과는 다른 구성을 보여준다. 기존 작품들이 범인이 누구인지를 찾는다면, 이 소설은 범인이 누구인지 아는 상황에서 시작한다. 범인의 정체가 아니라 범죄의 은폐 방식에 대한 궁금증으로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네 현실에서는 이보다 더 참신하고 극적인 이야기가 펼쳐진 듯하다. 범죄의 진실을 밝히는 이가 범인이라는 창조적 결말이 바로 그것이다.

삽화: 최지수 기자 orgol222@snu.kr

노회찬씨가 ‘안기부 X파일’에 등장하는 검사 실명 공개로 유죄를 선고받고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 ‘안기부 X파일’은 1997년 대선 즈음, 삼성그룹 비서실장과 중앙일보 사장이 대선후보와 검찰 인사들의 추석 떡값에 대해 논의한 상황을 도청한 녹취록이다. 안기부가 도청한 280여개의 테이프는 2005년 존재가 알려졌고, 건국 이래 최대의 정·경·검·언 유착사건으로 불리게 된다. 이후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었지만, 결국 뇌물을 준 사람과 받은 사람 어느 누구에게도 죄를 묻지 않았다. 대신 X 파일을 보도한 기자와 수사를 촉구한 국회의원이 죄인이 되었다. 그리고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검사는 이제 새 정부의 법무부 장관이 되려 한다.

새 정부의 각료 인선이 순탄하지만은 않은 듯하다. 여러 후보자들에게서 탈세, 투기, 편법 증여, 판공비 유용 등 개인의 이익에 몰두했던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더구나 가계곤란 장학금 수령, 세금 부당환급, 미국국적 자녀의 건강보험 적용 등의 깨알같은 재치도 인상깊다. 염치없음이 놀랍긴 하지만,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늘리려고 했을 뿐이라는 점에서 차라리 큰 염려가 들지는 않는다. 후보자들의 다른 공통점은 이른바 ‘전관예우’ 의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공직에서의 지위를 바탕으로 사적 집단의 이해관계에 복무했던 그들이 이번 공직을 마치고 나면 훨씬 더 가치 있는 인재로 대우받을 것이다. 사익을 위해 헌신했던 그리고 헌신할 이들이 공적 기구를 책임지는 상황은 국가의 운영이 사기업의 파견근로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만 같아 걱정스럽다.

그런데 불행히도 더 심각한 문제가 존재한다. 노회찬 판결에서 사법부는 삼성과 검찰의 유착관계가 비상한 공적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공적 관심사를 공론장의 의제로 정의내린다면, 재판부의 판단은 지극히 합당하다. 그 사안은 언론에서도 의회에서도 주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둘의 유착 관계가 공적 사안으로 다뤄지지 않는 현상은 우리 사회의 어떤 변화를 징후적으로 드러낸다. 어느 순간부터 사기업과 국가의 운명이 동일시되는 곳에서, ‘공’에 대한 ‘사’의 지배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이제 사적 이익에 맞서 공적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은 오히려 공동체의 안녕을 해치는 이가 되어 법적 처벌을 받는다.

소설의 X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현실의 X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삶을 헌신한다. 그럼에도 X가 사회적 인정과 존경을 받는 것은 공적 기구를 자신의 도구로 변신시키는 X의 능력을 막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이번 판결을 계기로 촉발된 관심은 X의 공화국을 우리의 것으로 되찾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김경근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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