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그 기도하는 손을』

박성창 교수
(국어국문학과)

신입생 K에게,

관악산의 골바람이 아직 찬 삼월입니다. 여기에 오기까지 여러분들이 겪은 각고의 노력과 고생을 떠올리니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관악의 한 가족이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호기심이 가득 찬 눈으로 관악의 곳곳을 누비는 여러분이야말로 신록(新綠)의 원천이 아닐런지요. 제가 삼십여년 전 관악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와 비교해보면 훨씬 자신감 넘치는 여러분의 당당한 표정은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어깨 위에 놓인 무거운 짐이 자꾸 눈에 밟히네요. 치열한 경쟁 끝에 입학한 여러분이 더 치열한 경쟁을 준비해야 하고, 더 큰 경쟁의 시스템 속으로 뛰어든 것이니까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면서도 기성세대로서 안쓰러움과 미안함을 먼저 고백합니다. 대학생활의 낭만을 입에 떠올리는 것조차 조심스럽군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 저/송태욱 역/자음과모음/287쪽


이른바 ‘힐링’을 키워드로 삼아 청춘을 위로하는 책들이 청년 독자들을 파고들고 있습니다. 이 책들을 통해 상처와 좌절이 잠시 누그러지는 위로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힐링과 공감을 통한 잠시 동안의 위로가 아닙니다. 새내기로서 여러분들은 여러 교수님들과 선배들로부터 많은 충고와 조언을 접했을 겁니다. 제가 한 마디 보탠다면 단절과 도약의 모험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대학생활이란 부모와 가정 그리고 학교라는 울타리에 안주하지 않고 단독적인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입니다. 그 주체가 공동체, 사회, 세계 나아가서는 우주와 어떤 관계를 맺을지 고민하는 과정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맛보게 되겠지요. 그 단절과 도약의 과정은 힐링과 공감만으로 완성될 수 없습니다.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란 부제가 달린 책을 우연히 읽게 되었지요. 추천해준 사람도 없었고, 책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서점을 돌아다니다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강렬한 제목에 이끌린 지도 모릅니다. 책과 혁명이라니, 도대체 이 둘 사이에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제목이 암시하는 극단적인 수사에 담긴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런 의문을 떠올리며 책장을 넘겼습니다.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요. 워낙 일본에는 프랑스 현대 사상가들의 사유를 알기 쉽게 풀어내는 저술의 전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밑바탕에는 피에르 르장드르라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프랑스의 종교사회학자의 사유가 깔려 있더군요. 책을 읽어나가면서 저는 격정적인 구어체와 특유의 반어법 같은 독특한 문체에 실려 있는 고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에 매료당했습니다. 또한 저는 이 책이 앞서 언급한 단절과 도약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경쟁에 뒤지지 않으려면 지식과 정보를 얻지 않으면 안 되고, 매일 최신의 정보로 갱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의 단절. 읽기와 쓰기의 세계로의 도약.

독서를 권장하고 예찬하는 책들은 많습니다. 구태의연한 독서권장론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제 이야기를 더 들어보세요. 이 책은 독서에 관한 관습적인 생각을 뒤집으면서 도대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도전합니다. 저자는 읽는다는 행위를 ‘알아버리면 미쳐버릴지도 모르는 어떤 것’에 무의식적으로 접속하려는 욕구로 정의합니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무료한 시간을 재미있게 보낼 수도 있고, 최신의 정보를 얻을 수도 있으며, 타인의 삶을 엿보고 공감하는 흔치 않은 기회를 얻을 수도 있겠지요. 이 책의 저자에게 책읽기란 그 이상의 무엇입니다. ‘알아버리면 미쳐버릴지도 모를 어떤 것’을 만나려는(혹은 회피하려는) 위험한 모험입니다. 그렇기에 미쳐버리지 않으려고 독서를 하면서 무료함이나 난해함 같은 ‘기분 나쁜 느낌’을 방어기제로 작동시키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이 책의 핵심 명제로 들어가볼까요.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고쳐 읽는다는 것이고, 책을 고쳐 읽는다는 것은 고쳐 쓴다는 것이며, 책을 고쳐 쓴다는 것은 법을 고쳐 쓴다는 것이고, 법을 고쳐 쓴다는 것은 곧 혁명이다.”

책을 읽는다는 개인의 내밀한 경험이 읽기와 쓰기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혁명에 이른다는 이 진술이 낯설고 비논리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이런 관점에 입각해서 16세기 루터의 종교 개혁, 12세기 중세 해석자 혁명, 거슬러 올라가서는 이슬람을 정초한 무함마드의 사상을 해석하니까요. 종교 개혁을 비롯해 시대를 바꾼 혁명이 책에서 비롯되었다는 겁니다. 이 책은 목숨을 걸고 책을 읽었던 시대의 보고서입니다. 예를 들어 루터의 종교 개혁은 성서를 철저하게 읽고 다시 읽고 새롭게 읽은 끝에 도달한 책의 혁명으로 기술됩니다.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농민의 아들이었던 루터는 이 정도의 고민을 갖고 책을 읽었기에 ‘교황의 반대자’로 맞서면서 혁명을 이끌어냈 수 있었습니다. 11세기 말 피사의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로마법 대전』을 철저하게 읽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교회법을 창출하고 이를 근대의 기틀로 만든 12세기 중세 해석자 혁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문맹이었던 무함마드가 천사의 도움을 받아 『코란』을 읽고 알리는 과정 또한 매우 감동적으로 다가옵니다. 저자는 읽기와 쓰기를 통해 이루어진 문학적 혹은 언어적 혁명이 정치적 혁명에 선행하며 그보다 근본적인 것임을 서구의 종교적 혁명의 사례들을 통해 보여줍니다. 정치적 혁명이 흔히 폭력을 수반한다면 문학적 혁명은 폭력을 배제한 보다 근원적이고 순수한 변혁을 지향하니까요.

삽화: 최지수 기자 orgol222@snu.kr


저는 이 책이 서양의 종교적 혁명의 근원을 파헤친 책보다는 읽기와 쓰기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커다란 파괴력을 지닌 것인지 깨우치게 만드는 책으로 다가오기 바랍니다. 문명을 만든 기본적인 텍스트를 읽고, 다시 읽고, 다르게 읽고, 고쳐 읽는 일. 더 나아가 읽는다는 행위가 새롭게 쓰는 행위로 연결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방황과 열광과 변화를 경험해보기 바랍니다. 어쩌면 많은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읽는 것, 쓰는 것, 다시 쓰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뚜렷하게 응시하는 힘이며 세계를 변혁하는 원동력임을 몇 권의 책을 통해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값진 경험이 될까요. 그것이 『죄와 벌』이어도 좋고『논어』나『자본론』이어도 좋습니다. 이 책은 일본의 유명한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이 몇 년 전에 제출한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명제에 대한 열정적인 반론으로 읽힙니다. 이곳에서도 근대문학 종언론에 대한 논의가 분분했지요. 문학은 끝났다, 근대문학은 끝났다는 종말론에 굴복하며 기도하는 그 손을 ‘잘라’ 책의 한 페이지를 열어젖히고 한 줄을 과감히 써보라고 말합니다. 책에 대한 회의론 또한 문학의 종언론 못지않게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회의론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인류 최고의 발명품인 책의 세계로 파고들어가야 합니다. 독서가 힘이고 경쟁력이라면 읽기와 쓰기를 통한 인문의 스펙을 타고 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건투를 빕니다.

박성창 교수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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