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나의 학문을 말하다 ③

아무도 전공하려 하지 않는 학문을 연구하는 것은 불모지에 꽃을 피우는 것만큼 어렵다. 만약 그 학문이 우리 시대의 것이 아닌 선조들의 유산이라면 더욱 그렇다. 국내 유일의 ‘로마법’ 전공자인 최병조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한국에 근대 법학이 도입된 이래 그 누구도 본격적으로 파고들지 못한 미지의 영역을 홀로 개척해 나감으로써 국내 법학계에 조용한, 그러나 거대한 유산을 남겼다. 그 작업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대학신문』에서는 ‘로마법’이라는 방대하고도 채 손이 닿지 않았던 분야에 40년간 몸담은 결과 그 연구를 인정받아 2012년 학술상을 수상하게 된 최병조 교수를 만나봤다.

삽화: 강동석 기자 tbag@snu.kr

학문적 불모지, 로마법을 개척하다

‘국내 최초의 로마법 전임 교수’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그의 연구는 로마법의 특정 분야가 아닌 법 체계 전반을 향해왔다. 다수의 연구자가 존재하는 여타의 학문 영역과는 달리 연구자가 전무하다시피 한 로마법 분야를 연구한다는 것은 곧 그 세계의 기반을 잡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최병조 교수는 그 중에서도 생활 전반의 규범을 형성하는 민법 분야에서 학문의 뼈대를 잡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한 부분이 흥미롭다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정도로 로마법을 다뤄 온 최 교수는 로마 시대의 민법이 곧 현대 민법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중세까지 그 가치가 묻혀있었던 로마법은 르네상스와 함께 근대가 열리며 재조명 받았다고 한다. 최초의 근대적 대학이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에서 근대적 국가를 지탱할 새로운 국가 체계와 제도, 관념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법을 기초로 한 근대적 법학 체계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러 변형을 거쳤어도 그 원류는 계속해서 이어져 왔으며 그 결과 현행 민법의 80~90%가 로마법과 유사하다고 한다. 그가 로마법에 주목한 부분도 이 법체계가 가진 놀랄 만한 ‘현대성’이다. 때문에 그의 주요한 연구도 현대에 대한 적용 가능성을 근거로 이뤄지고 있었다. 90년대 대법원을 괴롭혔던 ‘점유’에 대한 개념적 혼란을 그의 로마법 연구 결과를 통해 전원 합의로 해결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왜 나는 로마법을 연구하는가

국내에서 거의 연구가 돼있지 않기에 연구가 막막했던 건 당연할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처음 로마법의 세계에 발담그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이를 말하기 위해서는 최 교수가 스스로 ‘무지랭이’라고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그의 대학 2학년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입학 이후 법을 진지하게 공부하지 않았던 최 교수는 2학년 1학기 때 중간고사가 끝나고 자신의 동기들이 시험을 치른 뒤 나눈 대화조차도 이해하지 못하자 충격에 빠졌다. ‘이대로는 안되겠다’며 민법책과 함께 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대천 해수욕장. 그는 그해 여름방학, “해수욕장에 조그마한 텐트를 치고 따가운 햇볕 아래에서 소위 말하는 민법 1독을 했다”고 웃으며 말한다. 그가 당시 공부하던 교재의 서두 부분에 쓰인 로마법에 대한 아주 짧은 언급은 명동의 해외 서적, 곳곳의 헌책방으로 그를 이끌었다. ‘어떠한 법 조항이 로마법의 어디서 왔다’는 식의 간략한 설명이 그의 지적 욕구를 자극했던 것이었다.

로마법학이 품고 있는 무궁무진한 적용 가능성을 갖고 최 교수가 가장 최근에 진행한 연구는 서양의 고전법과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법률 사건들을 비교한 것이다. 오늘날 법학의 근간을 이루는 서양의 고전적 법체계를 통해 동양적 법체계의 원류를 추적하고자 한 시도라 볼 수 있다. ‘조선의 법률이 어떠하다’는 사료 수집의 시각에서 벗어나 ‘어떻게 해서 이러한 법률이 제정됐다’는 분석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조선 시대 법학은 현대에 실로 많은 메시지를 품고 있다고 최 교수는 주장한다. 이는 한국 현대 법학이라는 범위를 넘어 현재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에 대한 원형을 발견할 수 있는 시도라는 의미를 지닌다. “사료가 부족해 충분한 연구를 못할 줄 알았다”는 걱정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그는「동양 법사고의 특성과 한계: 비교문화유형론적 고찰 - 지속가능한 민주주의를 위하여」등 다양한 논문을 발표하며 법학을 넘어 문화학 전반에도 업적을 남겼다.

남은 길과 가고 싶은 길

로마법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작된 그의 학문적 여정은 20대의 그를 ‘로마법 전공자’라는 정체성을 지니게 만들었다. 그렇게 40년 가량이 흐른 지금, 그에게는 지금까지 이룩한 업적보다 지금부터 해야할 연구들이 더 중요하게 생각된다고 한다. 그의 지적 욕구를 자극하는 주제는 키케로 시대의 혼란스런 상황에도 창조적으로 계발된 로마법학의 요소들이다. 법학과 역사학, 그리고 이를 넘어 수사학과 사회 상황 전반을 다뤄야 하는 방대한 연구가 그의 앞에 놓여있다. 그러나 그는 “공부해야 하는 양보다 몇년 안 남은 퇴직일자가 더 걱정”이라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최 교수는 후학들에게 “본인이 재밌는 일을 하라”고 강조했다. 오직 수학에만 몰두했던 한 고등학생을 평생 법학자의 길을 걷게 한 동인은 다름 아닌 재미였다. 그가 서울 곳곳의 헌책방을 뒤져 스스로 라틴어를 공부하고 전무하다시피 한 국내 로마법 연구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자기 갈 길을 간 것 또한 재미를 추구한 활동이었다. 그는 “자기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약간의 것을 위해선 흥미가 우선돼야 한다”고 말한다.

재미라는 돛대를 달고 아무도 개척하지 않은 망망대해를 홀로 탐험해온 최 교수의 일생은 안정된 미래를 상상하며 자신을 채찍질하기만 하는 오늘날의 많은 대학생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준다. 자기계발서 속 여느 ‘모 벤처기업 사장’이 핏대를 높여가며 강조하는 ‘개척자 정신’이 오히려 노교수의 조근한 말 속에서 더 진정성 있게 드러난 것은, 그가 누구보다도 스스로에게 충실한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에게 충실하며 누군가에게 기여하기. 그것은 그가 일생에 걸쳐 실천한 단순하면서도 울림이 있는 삶의 테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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