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현 교수
(철학과)
“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주권자의 지배 아래에 두어왔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지시하고,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고통과 쾌락일 뿐이다.”(J. Bentham)

이런 주장과 함께 벤담은 공리주의를 설파했다. 공리주의자가 보기에는 그러므로, 어떤 경우 사람들이 쾌락이 아니라 고통의 감내 또는 ‘금욕’을 택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그것을 통해 더 큰 쾌락 또는 ‘참다운’ 행복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결국 어느 경우에나 사람은 쾌락과 고통에 이끌려 행위한다는 것인데, 공리주의자에게서 이것은 사람이 선․악에 따라 행위한다는 말과 똑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소견으로는 어떤 대상이 갖는 ‘공리성(功利性)’ 내지 ‘유용성(有用性)’이란 그 대상이 사람에게 이익, 유리, 쾌락, 선(good) 또는 행복을 낳거나, 해악, 고통, 사악 또는 불행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는 경향을 갖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공리성 또는 최대 행복의 원리를 도덕의 기초로 받아들이는 신조는, 행위들은 행복을 증진시키는 정도에 비례하여 옳으며 행복의 반대를 산출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그르다고 주장한다. 행복이란 쾌락을, 그리고 고통의 부재를 뜻하며, 불행이란 고통을, 그리고 쾌락의 결여를 뜻하는 것이다.”(J. S. Mill)

‘양적’ 행복이니 ‘질적’ 행복이니,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니 ‘최소수의 최소 불리(不利)’를 분별해가면서 여러 가지 옷을 갈아입고 나타나 수많은 ‘현대인’들의 가치관을 대변하고 있는 공리주의는, 그러나 그것이 어떤 색깔의 옷으로 바꿔 입든지 간에 결국 행복과 이익을 한 가지로 본다거나 ‘이익’과 ‘선함’을 혼동하고 동일시함으로써 ‘도덕적으로 좋음(善)’ 또한 상대화한다. 그리고 이것은 마침내 인간 사회 문화에서 윤리 질서 자체를 무효로 만든다.

공리주의의 확산과 더불어 사람들은 ‘이익’과 ‘선함’을 교환 가능한 가치로 간주한다. 가령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영어 개념 ‘good’은 ‘선’이자 ‘좋음’, ‘이익’이며, ‘public[common] good’은 공익(公益)이자 공공선(公共善)이다. 그래서 이러한 ‘좋음’이나 ‘이익’ 일반에 ‘옳음’의 가치는 묻혀버리고, 거기에 ‘도덕적 선’의 자리가 별도로 마련되지 않은 터라, 행복한 삶이 곧 윤리적 삶이니, 이로써 자기 행복을 보장해 주는 자기 ‘이익’, ‘자기 욕구 충족’을 거리낌 없이 추구하는 삶이 참으로 ‘좋은’ 삶 곧 ‘행복한’ 삶이라는 생각이 일반화하였다.

유용성이 가치의 최고의 척도인 마당에서는, 어떤 것이 욕구실현에 유용하기만 하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그래서 욕구 실현에 가장 유용한 수단을 찾는 일은 매우 ‘합리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이때 ‘합리성(合理性)’이란 ‘이성에 부합함’이라기보다는 ‘이익에 적합함’으로 납득된다. ‘이치에 맞음’은 ‘이익에 부함함’ 곧 ‘합리성(合利性)’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타인과의 관계에서 ‘합리성’이란 ‘너의 이익과 나의 이익이 서로 부합함’을 뜻하는 것으로, 이제 이해관계가 서로 잘 맞아 떨어지게 일을 처리하면 합리적으로 일을 수행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로써 ‘이성적․합리적․이해타산적’은 동의어가 된다.

무릇 ‘합리성(合理性)’이 ‘합리성(合利性)’인 곳, 유용성이 최고의 가치 기준이 되는 자리에서는 “그것은 나의 욕구 실현에 유용하기는 하지만, 옳지는 않다”=는 발언은 자가당착이다. 유용한 것은 곧 옳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당에서는 “그것이 비록 많은 사람의 이익을 증대시킨다 해도, 옳지는 않다.”는 말 또한 헛소리가 된다. 많은 사람의 이익을 증대시킨다는 사실이 이미 ‘옮음’을 증명한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짝자꿍을 잘 하는 것이 최선인 것인가? 요즈음 짝자꿍이 ‘정의(正義)’의 모양새를 갖춘 것을 자주 본다.

백종현 교수(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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