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근 기자
취재부
매서운 꽃샘추위가 몰아친 어느 날, 서울 소재 모 대학교 셔틀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학생들 앞에 애처로이 그러나 담담하게 본인들을 소개하는 청년 둘이 있었다. 그들은 추위로 외투를 여미는 적잖은 대중 앞에서 입었던 외투도 벗어둔 채 자신들을 소개했다. 자신들은 학생들을 대변할 수 있는 총학이 되겠노라고, 학생들의 복지와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연단과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셔틀 줄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학생들은 견학 온 학생들로 보였다. 일행이 있는 이들은 친구들과 수다를 떨기에 바빴고 일행이 없는 누군가는 학생의 대표가 돼 노력하겠다는 누군가의 출사표 대신 귓속 깊숙이 꼽은 이어폰으로 다른 무언가를 듣기 바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들은 모두 해당 학교의 대학생이었다. 오늘날 대학생들의 자치에 대한 관심은 그날의 추위만큼 너무나 차가웠다.

만약 이러한 기사나 글을 대중 매체에서 접했다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학생들의 행동에 분노할 것인가, 후보들을 동정할 것인가? 아니면 학생들이 그랬을 때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한없이 넓은 마음으로 이해할 것인가?

사실 위 이야기는 지난 목요일 본부 앞 셔틀정류장에서 열렸던 공동선본발족식을 재구성한 것이다. 우리학교 학생임이 분명했지만 발족식에 관한 의견을 듣고자 다가간 예닐곱 명 모두 “듣지 않아서 모르겠다”라고 답하는 한결같은 모습과 학생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나온 선본의 자기소개를 마치 라디오에서 나오는 제품 광고 정도로 생각한 듯 너무도 당당히 듣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들을 보며 나는 문득 직전 총학에 대한 스누라이프 내 비판여론이 떠올랐다. 스누라이프의 수많은 글은 총학의 무능함을 꾸짖고 학생회장을 비판하기 바빴다. 물론 총학생회장으로 뽑힌 이상 이러한 비판은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48.738%의 투표율로 무산된 1차 선거와 연장 투표까지 진행된 재선거에서 50.37%의 투표율로 겨우 성사된 제54대 총학에게 과연 우리가 결과론적으로 냉철히 비판하는 것이 합당한가란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그들을 비판하고 실망할 만큼 충분히 지지하거나 관심을 가졌던가? 혹은 그들의 정책이 올바르게 진행되는지 임기 내 한번이라도 감시해본 적 있는가? 눈앞에서 이야기하는 순간도 들어주지 않으면서 나에게 헌신하는 총학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 이율배반적이지 않은가.

지난주 최초로 직선제로 진행된 교수협의회 선거에서 62.1%의 투표율로 신임 교수협의회 회장이 선출됐다. 이를 통해 교수협의회는 본부에 더 많은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당위성을 확보했다. 총학 역시 마찬가지다. 학생 의견을 대변할 수 있는 기구로서의 당위성 확보는 다가올 재선거의 투표율이 보장해줄 수 있을 것이다. 총학이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자. 비판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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