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석 박사과정
(사회학과)
북적북적 붐비는 인파와, 산뜻한 홍보물들을 보면 ‘관악’에도 어김없이 봄이 왔나 보다. 그러나, 생동거림 속에는 웅성거림과 고통 또한 들린다. ‘삼포세대’, ‘88만원세대’, 청년실업과 무한경쟁. 새내기 대학생들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얼굴 한편에 그늘이 드리우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리라. ‘실천지성’, ‘비판’이라는 말조차 쉽게 꺼내기 어렵다. ‘스펙’과 ‘취업’의 압박 속에서 ‘민중해방의 불꽃’이라던 ‘관악’이 국립대학법인으로 변한 것 같다. ‘反대학’, ‘대안대학’을 외쳐대던 고민의 흔적은 사라지고 외국드라마에서나보던 그런 대학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절망.’

중국의 대문호 루쉰은 『외침』 서문에서 ‘창문 없는 쇠로 만든 방’의 비유를 들었다. 절대 부술 수 없는 쇠로 만든 방에 수많은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져있다. 그들은 죽겠지만, 죽음의 비애는 느끼지 못할 것이다. 만약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몇몇이라도 깨운다면, 이들은 가망 없는 임종의 고통을 느낀 채 죽어갈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깨워야 하는가, 재워야 하는가!

바보는 노예를 구할 수 없고 단지 노예를 깨워 길이 없음을 알릴 뿐이다. 현인은 노예를 구할 수는 있지만, 그 방법이란 노예를 깨우지 않고 그대로 꿈을 꾸게 내버려두는 것이다. 노예는 구원 없는 절망 속에 가야 할 길이 없다는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런’ 상황을 견뎌야 한다. 견딜 수 없다면 자신이 노예라는 자각을 잃고 주어지는 환상의 ‘해방’에 안주하고 만다. 견딜 수 있다면 노예임을 거부하는 동시에 해방이라는 환상도 거부하게 된다. 마주한 절망적 상황을 직시함으로써 절망에 절망하며, 극한상태의 몸부림(?) 속에서 저항을 만들어간다. ‘절망의 절망.’

“절망이 허망함은 바로 희망이 허망함과 같다.”(루쉰) 저항이 절망의 행동화로 드러난다 할지라도, 이는 결코 희망찬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에 가득 차서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웅성거림이나, 분에 못이겨 나오는 ‘외침’일 듯 싶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환상의 ‘해방’에 안주하는 것이 낫겠다. 더구나 예전의 현인과 바보들조차 어디론가 다 사라져버린 요즘. 그런데, 정말, 그들은 어디에 있을까? 응답하라, 1990년대여.

그저 몇 년 더 산 선배라는 미명 하에 당위로 강박하거나 거짓된 희망을 안겨주고 싶지는 않다. 큰 고난이 닥치면 치열하게 넘어서기보단, 때로는 돌아감이 현명한 거라고 말하고도 싶다. 꿈과 희망은 이미 많이 들었을 게다. 난 오히려 지금 현실이 이것밖에 되지 못했음에 선배로서 용서를 구한다. 지금의 문제 중 상당수는 새롭다기보단, 매번 반복되어 진부하다는 느낌이다. 참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꽤나 절망스러웠을 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의 절망’이라는 길을 가보고자 한다면 나 또한 회심(回心)하여 그 길의 동반자로서 이렇게 외쳐보고 싶다. “생각해 보니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거였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시 땅 위엔 길이 없다. 다니는 사람이 많다 보니 길이 되어버린 것이다.”(루쉰) 그렇다. 김정환 시인의 시처럼, 벼랑에 서있다기보다는 스스로 벼랑이 되어야 한다. 세상을 변혁하려 한다면 더욱. 그리고 그 적막 속을 질주하는 용사들에게 거침없이 내달릴 수 있도록 얼마간 위안이라도 주고 싶다. ‘관악’의 봄을 축하드립니다.

윤종석(사회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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