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관악을 밝히는 숨은 얼굴들 ①

3식당(농생대 식당)에서 근무하는 정순식 주방장은 1977년 2식당 개관과 함께 생활협동조합(생협) 조리사로 캠퍼스에 들어왔다. 그가 처음 조리사 근무를 시작했던 곳은 왕십리 공장 옆의 작은 식당이었다. 당시에는 식당끼리 많은 왕래가 있었고, 그는 친구의 추천으로 이곳 관악에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다. 함께 왔던 친구들은 모두 자리를 옮기고 지금 정 주방장은 생협의 조리사 중 가장 오래 캠퍼스를 지킨 사람이 됐다. 캠퍼스에 새로운 식당들이 생겨나 근무 식당을 종종 옮기기도 했지만 “내게 있어 최고의 요리는 고객들인 학생들이 식당 게시판에 맛있게 먹었다고 적어준 요리”라는 그의 요리 철학만은 변함이 없다. 『대학신문』은 학내 구성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35년간 노력해 온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사진: 주현희 기자 juhieni@snu.kr

 

정 주방장을 비롯한 생협 조리사들은 하루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낸다. 오전 7시에 출근해 재료를 검수하고 다듬어야만 점심시간을 맞춰 음식을 준비할 수 있다. 그리고는 쉴 틈 없이 조리와 배식, 뒷정리 작업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한 순간도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된다. 그의 말처럼 “주방에서는 작은 실수가 큰 위생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아침조회 시간은 물론 식사 시간과 같은 짬짬이 시간에도 다른 조리사들과 고쳐야 할 점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바쁘게 일과를 마치고 나면 6시로 어느덧 퇴근시간이다. 11시간이 넘는 근무 시간 동안 신경을 곤두세우고 나면 녹초가 돼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가 이런 생활들을 보낸 지도 35년이 지났다. 생협에 소속된 조리사 중 가장 오래 근무한 만큼 서울대 내 식당의 변화를 누구보다 가까이, 오랫동안 지켜본 것도 그이다. “예전에는 설거지 할 곳이 없어 커다란 고무통에 식기를 쌓아두고 하나하나 설거지했다”며 과거의 기억을 되살렸다. 여전히 식기를 정리하는 데는 일손이 필요하지만 지금은 식판을 옮기는 컨베이어 벨트며 식기세척기, 자동건조기까지 생겨 더 편리하게 설거지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는 그의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학생들에 대한 옛 추억담 하나를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옛날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학생들이 식판 하나에 밥을 받아 돌아가면서 먹기도 했다”며 이제는 볼 수 없는 그 시절의 풍경을 말했다. 또 “그때는 학생들이 생협이나 학내 노동자에 많은 관심을 가져 과거 생협 파업 때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다”고 말하며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기도 했다. 당시 학생들은 소비조합(현재 생활협동조합)의 파업으로 불편함을 겪었음에도, 지지공연을 열고 장터 수익금을 전달하는 등 적극적인 연대에 나섰었다.(『대학신문』1987년 9월 28일자)
 

정 주방장은 학생들의 식사를 오랫동안 책임져온 만큼 끼니를 거르는 학생들에 대한 걱정의 말도 아끼지 않았다. “가급적 아침을 꼭 먹었으면 한다”면서도 “아침을 먹을 수 없는 경우에는 가츠오부시 육수에 계란과 두부를 넣은 계란탕을 해먹거나 우유와 함께 잣, 아몬드 등 견과류를 먹기만 해도 도움이 된다”며 아침을 거르기 십상인 학생들을 배려한 메뉴를 추천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학내 구성원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잔반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자율배식인 김치다”며 “먹을 만큼만 가져가 잔반을 줄여줬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남겼다.
 

35년간 “직업이기에 최고는 안 될지언정 최선은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일해 온 그와 같은 주방장이 있어서일까. 서울대 생협은 한 번도 식중독과 같은 단체 사고가 없었다고 한다. 또 작년 경향신문의 학생식당 평가에서 최고 등급을 받기도 했다. 마음 놓고 먹을 것이 없다는 말이 일상처럼 들리는 요즘에도, 학교 안에서 믿고 먹을 만한 식당이 있다는 것은 정 주방장을 비롯한 생협 직원들이 긴장에 찬 매일을 보내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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