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경 교수
(정치외교학부)
조용해 보이는 여학생이 찾아와서 국제개발협력 논문공모에 응하고자 하니 지도교수가 되어달라고 했다. 준비해 온 내용이 참신하기는 하나 대학을 몇 학기 밖에 다니지 않은 젊은이의 작품이라 어설퍼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 토론도 하고 추천서도 썼다. 다행이 이 학생은 장려상과 아마 몇 십만 원 정도의 상금도 받았던 것 같다.

다음 학기에 그 학생이 또 찾아왔다. 국제개발경시대회 논문 공모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저개발국의 수많은 넝마주이들을 활용한 효과적인 재활용 시스템을 만들어 환경과 일자리라고 하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는다는 아이디어였다. 디테일이 상당하고, 현황에 대한 조사도 충실하다. 이 여학생이 만든 팀은 일 단계 논문 심사를 통과하고 결선에 진출하여 심사위원들 앞에서 발표를 하게 되었다. 일주일쯤 뒤에 결과가 나왔는데, 이 팀이 쟁쟁한 명문대 대학원생 팀들을 제치고 일등을 했다. 오백만원 상금도 받았다.

올해 우리나라가 저개발 국가의 사람들을 돕기 위해 쓰는 돈, 즉 공적개발원조(ODA) 자금의 규모는 2조원을 넘을 예정이다. 인구가 우리나라의 5분의 1 밖에 되지 않는 스웨덴이 쓰는 돈의 반도 안 되므로 적다고 볼 수도 있겠다. 국민총소득의 0.2%에 못 미치는 정도이니 유엔 밀레니엄 프로젝트가 설정한 0.7%까지는 먼 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개발원조 규모의 증가율은 세계 최고이다. 경제가 꾸준히 성장하고 원조공여국의 평균적인 공여 수준에 도달한다면 개발원조 예산 10조원 시대가 올 것이다.

원조가 필요할 정도로 나라가 가난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중 가장 큰 것은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정부이다. 부패한 정부에 막대한 규모의 원조금을 맡길 수는 없다. 그래서 원조선진국들은 원조 받는 나라의 정부를 거치지 않고 공동체 단위를 지원하는 지속가능한 원조모델을 개발하는 데 힘써왔다. 또한 원조라는 사업의 특성상 원조를 주는 나라의 유권자들이 사업의 수혜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감시와 평가가 느슨해지기 쉽다.

우리나라는 짧은 경험으로 감시와 평가의 어려움 속에서 매년 수조 원의 돈을 써야 한다. 그중에 수천억 원은 사실상 우리나라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개발협력과 무관해 보이는 정부의 각 부처가 원조관련 예산을 신청하고, 대학들에서 개발원조 프로그램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또 여러 원조 전문 비정부 조직들이 만들어지는 것이 놀랄 일이 아니다. 수십억이나 백억이 넘는 단위의 개발원조 예산이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쓰이는 경우도 보게 된다.

이번 학기 초에 그 여학생이 인사를 드린다며 다시 찾아왔다. 휴학을 했고 곧 출국하여 일년을 베트남에서 보낼 것이라고 한다. 민간 개발협력단체의 일원으로 베트남 어느 시골 마을에서 마이크로크레딧(무담보소액대출) 사업을 할 것이라고 한다. 저개발국의 영세민들에게 자활의 기회를 주는 데 효과적임이 증명된 사업이다. 이 학생은 몇 십만 원, 몇 백만 원의 상금 때문에 개발원조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님을 알겠다. 두 번 입상을 하면서 스펙보다 훨씬 중요한 것을 쌓고 있었나 보다. 나는 이 학생이 가난한 봉사자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백조 원 규모의 세계 원조 ‘시장’에서 유능한 사람들은 충분한 물질적 보상도 받게 되어 있다. 물론 세계를 무대로 하는 보람있고 '간지'나는 삶이 가장 큰 보상일 것이지만. 지구적 차원의 포부와 지구촌 시민의 규범을 가꾸기에는 가난하고 억눌려 성장했던 필자의 세대에는 개발원조의 증가를 눈먼 돈을 포획할 절호의 기회로 보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베트남에서 땀 흘리고 있을 그 여학생처럼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청년들에게서 희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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