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영화「지슬」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은 과연 무엇일까? 당신은 아마 고개를 갸웃하며 2천명이 사망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사건은 아름다운 ‘섬’에서 일어난 4·3사건이다. 1948년 미군정 아래에 있던 정부는 제주도 해안선 5km 바깥의 모든 주민을 폭도로 간주하고 사살하라는, 일명 초토화 작전을 개시한다. 제주도의 수많은 이름 모를 마을사람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밟는 그 땅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설움이 켜켜이 묻혀 있다.

감독이 목표로 제시한 ‘3만’ 관객은 잠정 집계된 제주 4·3사건의 피해자 수를 의미한다. 하지만 등장인물은 기껏해야 30명 남짓하다. 영화는 말미에 담담하게 크레딧으로 짧게 사건의 전모를 이야기할 뿐 4·3사건의 전체 맥락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려 하지 않는다. 이는 이데올로기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사람’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다.

처음으로 사람이 등장하는 장면은 살인의 긴장감이 감도는 제주도가 아닌 고요한 한라산의 한 오름 구덩이에서 시작된다. 세 사람이 앉아 있는 구덩이에 한사람씩 비집고 들어오더니 곧 발 디딜틈 없이 북적거린다. 옆으로 좀 비켜보라며 낑낑대는 이들의 대사는 위기상황치곤 살며시 웃음이 지어진다. 이는 불안을 덮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진짜 살내음이다. 아랫마을 사람들이 다 죽었다는 둥, 마을이 통째로 불탔다는 둥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내뱉으면서도 티격태격 대며 말다툼을 한다. 마을사람들로선 가늠할 수 없는 공포와 담담한 일상의 공존을 그려내는 감독은 이미 죽은 그들이 또 다시 아픔을 겪지 않도록 한다.

감독은 ‘죽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죽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애정을 가진다.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총을 겨눈 그들 또한 상처 입었다. ‘빨갱이’를 잡지 못해 알몸으로 보초를 서는 일병과 그를 돕고자 하는 동료는 함께 벌을 서며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내가 죽이고 싶어서 죽이냐, 다 그 뭐같은 명령 때문에 하는 거지” 결국 이들은 총을 겨누는 대신 걸리는 즉시 사형 당하는 탈영을 선택하게 된다.

같은 듯 다른 두 집단을 이어주는 것은 바로 ‘지슬’이다. 땅의 열매라는 지실에서 유래된 지슬은 제주도 방언으로 감자를 뜻한다. 주민들이 동굴 속에서도 삶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감자 한 알 덕분이었다. 하지만 감자는 식량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신병은 한동안 굶은 일병에게 배고픔을 견디라며 지슬을 건내준다. 일병은 이 지슬을 다시 포로로 잡힌 소녀에게 건네고자 하지만 이는 그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다리가 불편한 노모를 집에 놔두고 온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 아들은 어미를 찾으러 집으로 돌아간다. 허나 그를 맞이하는 건 불타버린 집과 죽은 어미의 품에서 익은 ‘지슬’ 뿐, 그는 조용히 눈물지으며 이것을 챙겨 동굴 속 식구들과 나눠먹는다. 생에서 죽음으로, 죽음에서 생으로 이어지는 지슬은 역사의 장에 쓰이지 못한 채 사라져버린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렴풋이 느끼게 한다.

지슬이 단지 4·3사건을 다뤘다는 사실만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예술적’ 제례이다. 경건한 흑백의 화면 위에 차례대로 새겨지는 신위, 신묘, 음복, 소지의 구성은 제사의 절차를 따르고 있다. 영화 전체가 하나의 제사인 것이다.

감독은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이미 ‘영혼’이 됐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영화는 종종 초월적인 기운을 느끼게 하는 장면들을 자아낸다. 영화의 첫 장면, 카메라는 자못 신성한 기운마저 느껴지는 한라산 정상의 운무를 고요히 비춘다. 제사에 피우는 향을 연상시키는 ‘연기’ 모티는 이후에도 계속되는데 동굴로 들어오려는 군인들을 쫓기 위해 피우는 연기는 군인들과 마을 사람들 모두를 차츰 삼켜간다. 동굴 속 사람들을 일렬로 비추는 장면 또한 일종의 영정사진을 연상시킨다. 밝기가 조금씩 바뀌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사람의 모습을 일관되게 보여주는 이 장면은 흑백의 아름다움을 고조시키며 ‘유령’의 모습을 묘사하는 듯도 하다.

이 무채색의 진혼제가 끝나갈 무렵 영화는 지방지를 태우며 한사람, 한사람의 넋을 위로한다.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되지 못해 생전에 입었던 옷가지를 묻어 묘지를 만들었다는 그들의 서러움을 달래주려 한다. 진정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구체적이고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이며 여기서부터 시대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값싼 동정의 눈물 흘리는 대신 속으로 울부짖는 오멸 감독의 ‘지슬’. 그는 땅 속 깊이 묻힌 지슬을 캐듯 제주도의 슬픔을 끌어내어 한라산 너머 푸른 하늘위로 고이 올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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