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모모」에는 특이하게도 시간을 훔치는 도둑이 등장한다. 이들의 절도 방법은 여느 것과는 사뭇 다르다. 시간저축은행에서 일하는 회색 신사들은 그저 사람들에게 더 열심히 살 것을 제안할 뿐이다. 성과를 내지 못하는 시간은 헛되이 낭비되는 것이라는 회색 신사들의 설득에 따르는 사람들은 남보다 앞서가게 되지만, 시간을 아껴 저축할수록 점점 더 시간이 없어지고 바빠진다. 그렇게 사람들의 삶은 점점 회색빛이 되어간다.

한국의 장시간 노동은 독보적이다. 2010년 연간 노동시간은 2,193시간으로 OECD 평균인 1,749시간과 큰 차이를 보인다. 격차는 생산직이 더 크다. 현대차 노동자들의 평균이 2,678시간인데 반해, 선진국 자동차 업체들의 경우 1,500~1,600시간에 불과하다. 한국의 또 다른 특징은 심야 노동이 보편화되었다는 것이다. 해외여행을 해본 이라면 그네들의 밤 풍경은 우리와 많이 다름을 느꼈을 것이다. 깜깜한 거리로 변하는 그네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밤이 되어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게 24시간 돌아가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밤 새 일하고 있다. 2007년 국제암연구소가 야간노동을 발암요인으로 지정했지만, 사정은 별반 달라지는 것이 없는 듯하다.

장시간 노동과 심야노동이 결합된 현실은 일하는 이들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건강을 위협하여 과로사와 산재질환이 속출하고 있으며, 휴식과 여가를 즐기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친구는커녕 가족들과도 깊이 있는 교류를 가지지 못한다. 그들은 살기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살고 있으며, 때론 일로 인해 삶이 중단될 지경에 처하기도 한다.

삽화: 최지수 기자 orgol222@snu.kr

지난 3월 4일, 현대차 노동자들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주간연속2교대제가 시행되어 근무형태가 46년만에 변경된 것이다. 예전 낮 10시간, 밤 10시간 교대 근무는 이제 8시간, 9시간으로 바뀐다. 노동시간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밤샘 노동이 없어져 노동자들도 밤중에는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현대차의 이번 변화는 한국 노동자의 삶의 풍경을 바꾸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쉬움도 존재한다. 노동시간은 줄었지만 기존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노동강도를 더 높인 것이다. 결국 노동시간 단축은 신규 고용창출로 이어지지 못했으며, 노동자들의 건강 증진에도 한계를 가지게 되었다.

더 안타까운 점은 자신의 삶과 생명을 지키려는 노동자들의 요구가 철저히 묵살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지난 2011년,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약속 준수를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노사는 이미 2009년에 교대제 변경을 합의한 상태였다. 하지만 파업 첫날 바로 직장 폐쇄가 이루어지고 용역깡패의 폭행이 가해진다. 그리고 연봉 7천만원 운운하는 대통령의 조롱 속에서, 공권력에 의해 강제 진압된다. 그렇게 “밤엔 잠 좀 자자”라는 노동자들의 요구는 비현실적인 주장으로 치부당한 채, 침묵을 강요당했다.

웹툰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의 노력은 너무나도 감동적이다. 비록 계약직이지만 그는 잠자는 시간마저 아껴가며 일에 매진하고, 매순간 최선을 다한다. 그러한 열정은 동료들의 헌신과 어우러져 멋진 성과들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작품의 감동을 마냥 편하게만 즐길 수는 없는 듯하다. 시간에 대한 권리를 일터에 양도한 사회에서, 장그래가 더 열심히 일할수록 또 다른 장그래를 만들어낼 뿐이다. 부지런함의 결실을 회색 신사들이 가져가버리는 사회에서, 장그래는 ‘아직 살아있지 못한 자’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것, 그것은 우리가 주권을 되찾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김경근 간사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