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이후에서야 신문이라는 매체를 접하게 된 우리 세대에게 ‘보는 신문’이라는 개념은 그리 낯설지 않다. ‘보는 신문’이란 말 그대로 기사뿐만 아니라 사진, 삽화, 그래픽 등 종합적인 시각정보를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을 말한다. 시중의 종이신문들은 ‘보는 신문’으로의 변화를 통해 독자들의 시선을 끄는 한편 장문의 기사로도 전달할 수 없는 메시지를 한장의 사진으로 압축해 전달하기도 한다.

사실 ‘보는 신문’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1980년대까지만 해도 종이신문에서 기사 면적 가운데 사진이 차지하는 면적이 10%를 밑돌았다고 한다. 이러던 것이 1990년대에 13%로, 2000년대에 들어서야 25% 수준으로 증가했다. 양적 발전과 더불어 질적 변화도 있었는데, 이는 ‘보다 크게, 보다 가깝게, 보다 생동감 있게’란 말로 요약된다.

그렇다면 ‘보는 신문’으로서 『대학신문』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보다 작게, 보다 멀리, 보다 정적으로’라고 정리할 수 있다. 지난 3월 18일자 2면의 관악사 장터를 다룬 포토뉴스가 대표적이다. 이 보도사진에서 느껴지는 것은 장터의 생동감이 아니라 담당기자의 소극적인 모습이다. 독자가 궁금한 것은 장터의 모습이지 서울대생의 뒤태가 아니다.

강연회나 심포지엄 등의 기사에 들어간 사진들을 보면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이 부분은 특정 지면의 특정 기사를 지목해 설명하기 힘들 만큼 이번 학기 『대학신문』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문제다. 사진기자들이 다가갈 수 없게 만든 선이라도 쳐놓은 것처럼 하나같이 멀리서 전경을 담고 있거나 “아 그냥 저기 연사가 서 있구나”라는 걸 확인시켜주는 무미건조한 사진뿐이다. 피사체의 표정은 물론 사진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읽을 수 없다.

학생들의 뒷모습을 찍는 것은 쉬운 일이다. 표정을 살피지 않아도 되고, 찍히는 사람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된다. 멀리서 찍는 것 역시 쉬운 일이다. ‘결정적 순간’에 대한 고민도 필요 없고 피사체가 도망가는 일도 없다. 하지만 이런 사진을 지면을 통해 접한 독자들의 반응은 “사진 참 무성의하게 찍었네”이다. 좋은 보도사진을 위해서는 사진기자가 대상에 더 다가가야 하고, 더 많이 찍어야 한다. 또 취재기자가 기사를 쓰는 데 들이는 취재량만큼 사진기자 역시 좋은 사진을 위해 많은 것을 조사해야 하고 좋은 그림을 머릿속에 그려봐야 한다.

보도사진은 다른 사진들과 비교해 특수한 지위를 갖는다. 바로 사진에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 때문인데, 『대학신문』의 보도사진에서는 그런 메시지를 읽어낼 수 없다. 편향된 시각을 담으라는 주문이 아니다. 지금처럼 그저 지면을 때우기 위해 급조된 보조물이 아닌, 적어도 ‘이 신문이 이런 부분에 주목했구나’라는 것 정도는 읽을 수 있는 보도사진을 보고 싶은 것이다. 다음주부터는 ‘나눔 방앗간’을 다루는 기사라고 해서 나눔 방앗간의 간판을 찍은 식의 사진이 실리지 않는 『대학신문』을 기대한다.


송성환
불어교육과·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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