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 추상예술의 아버지 김환기 탄생 100주년

“지중해는 참 아름답습니다. 한국의 하늘은 이 지중해보다 진해 하얀 손수건을 담으면 파랗게 물들지요.” 김환기가 프랑스 니스 전시회에서 한 말이다. 백자 항아리에서 찾은 ‘평범한 것의 위대함’을 통해 ‘반(半)추상’이라는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해 ‘한국 추상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김환기. 『대학신문』에서는 김환기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치열했던 삶과 예술세계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눈길을 걸으며 남긴 60년의 발자국=수화(樹話) 김환기는 1913년 전라남도 신안에서 대지주 김상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귀한 아들이 고향에 남아 가업을 잇기를 바란 아버지와 갈등하던 김환기는 32년 선착장이 있는 섬까지 헤엄쳐 결국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 일본 미술계는 입체파, 야수파로 대표되는 서양의 현대 미술 양식들이 수입되고 있었다. 김환기는 파리에서 피카소와 함께 작업했던 후지타 쓰구하루 등에게서 추상미술을 접한다. 그리고 전위적인 화가들의 모임인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에서 활동하며 현존하는 한국 추상화 중 가장 오래된 「론도」(1938) 등의 작품을 남긴다.

학업을 마친 김환기는 37년 귀국 후 국내에 ‘반추상’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창조한다. 대중들이 이해하기 난해한 추상미술의 한계를 돌파하고자 그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구상예술과 추상예술의 중도(中道)를 찾으려 했다. 이 과정에서 사실을 새롭게 조명하자는 ‘신사실파’를 조직해 이중섭 등 여러 화가와 함께 활동한다. 또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와 한국미술가협회장을 지내며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하지만 그는 이에 안주하지 않고 56년 마흔셋의 나이에 파리로 떠난다. 서양의 미술을 ‘학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선의 정서를 담은 작품으로 세계의 거장들과 당당하게 경쟁하고 싶어서였다. 실제로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로부터 호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파리에서 그는 동양인 화가에 대한 차별과 생활고로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이렇게 고난을 겪은 후에도 그는 3년반의 파리 생활 후 또다시 모두가 인정하는 홍익대 학장직을 버리고 63년 현대미술의 새로운 메카인 미국 뉴욕행을 결심한다. 침대 하나와 옷장이 전부인 방에서 김환기는 하루종일 작품에 몰입했다. 외로움과 싸워가며 탄생시킨 ‘점묘점화’와 같은 작품들은 뉴욕에 온 지 8년 만에 호평을 받게된다. ‘창조적인 예술가의 자세’를 몸소 실천한 인생을 살았던 그는 1974년 평생의 동반자인 아내의 곁에서 생을 마감한다.

◇달과 별이 된 조선의 얼=김환기는 조선의 미가 세계적으로 통할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구름, 매화, 도자기 등 우리 자연의 풍경과 전통기물을 그렸는데 특히 ‘달항아리’라고도 불리는 조선백자에 애착을 가졌다.

사진 제공: 환기 미술관


「항아리와 매화가지」(그림①)는 그가 파리에서 생활하던 1958년 그린 작품이다. 붓으로 빚어낸 새하얀 백자는 그 넉넉함이 마치 보름달을 닮았다. 자칫하면 밋밋해질 수 있는 캔버스에 수줍게 피어난 매화 몇송이가 앙증맞다. 특히 이 시기의 작품은 푸른색이 주를 이루는데 이는 김환기가 파리에서 서양의 화법에 매몰되지 않으려 했던 의지의 표현이었다. 서양의 ‘blue’가 우울함의 색채라면 김환기는 그 색으로 고려청자와 조선의 쪽빛 바다와 하늘의 생명력을 나타내려 했다.

사진 제공: 환기 미술관


파리에서 그린 작품 속의 한국적 소재들은 뉴욕으로 건너가면서 ‘반추상’에서 완전한 ‘추상’으로 전환된다. 그는 종이죽, 신문지 등 다양한 소재의 캔버스를 온통 점으로 채우는 등 실험적인 기법들을 시도한다. 윤익영 한국미술평론가협회장은 “이 당시 작품들의 절제된 색채와 점, 선, 면의 단순한 조형요소는 훗날 1970년대 한국 미술의 주류를 이룬 ‘모노크롬’ 학파에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나무와 이야기하다’는 의미를 지닌 그의 호 ‘수화(樹話)’처럼 그는 화폭에 자연과 우주의 질서를 오롯이 구현하고자 했다. 그의 말년 작품인 「10만 개의 점」(그림②)은 작은 점들이 모여 선을 이루고 그 선들이 모여 원을 이룬다. 나선이 만들어낸 원은 별이 소복하게 뜬 밤하늘을, 가늘고 흰 선은 산과 바다와 해를 닮았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푸른 색조는 우주의 생명력과 ‘점 하나가 친구 한 사람’이라 말했던 당시 김환기의 그리움을 동시에 보여주는 듯하다.

“예술이란 강렬한 민족의 노래”라고 말했던 김환기. 그는 평생 ‘조선의 특색’을 나타낼 수 있는 그림이 무엇일까 치열히 고민했고 그 결실은 생애를 통틀어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환기는 구상, 반추상, 추상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한국 미술계가 양적, 질적으로 풍성해지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김환기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와 관련된 여러 프로그램들이 진행 중이다. 환기미술관에서는 6월 9일까지 고인의 대표작 70여점과 유품을 선보이는 특별전을 열었으며 네이버에서 마련한 온라인 전시회를 통해서도 그의 작품 50점을 감상할 수 있다.

◇그의 예술을 사랑한 여인=김환기의 열정적인 삶은 아내 김향안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그녀는 단순히 김환기가 평생 사랑했던 여인을 넘어 예술적 지지자이자 조언자였다.

본명이 변동림인 김향안은 1916년에 태어났다. 아버지가 동학운동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일제에 재판을 받으며 생활고를 겪는 중에도 이화여전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던 그녀는 똑부러진 신여성이었다. 그녀는 작가 이상과 사랑에 빠져 함께 일본으로 떠나지만 이상이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미망인이 된다.

남편 이상의 죽음 이후 슬픔에 빠져있던 김향안은 운명적으로 김환기를 만나게 된다. 각각 이혼과 사별의 아픔을 겪었던 김환기와 김향안은 사랑을 키웠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혼인한다. 이 때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변동림에서 김환기의 아호였던 ‘향안’으로 개명한다.

김향안은 평생 김환기의 생계와 작품 활동을 내조했다. 김환기는 대지주인 아버지의 사망 후 땅문서를 소작인에게 모두 나눠줬고 평소에도 친구들과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해 수입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김향안은 남편의 경제적 능력 부족을 탓하지 않았고 조선 도자기를 수집하는 취미도 예술적인 공부의 과정으로 존중했다고 한다. 당시 김환기가 남긴 일기에는 “아내는 먹을 것이 있든 없든 항상 명랑하고 깨끗하다…(중략)… 아내가 능금을 좋아하는데 궤짝으로 사다 두고 먹여본 적이 없다”고 적어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드러냈다. 김환기가 세계를 무대로 활동할 수 있었던 데도 김향안의 도움이 컸다. 그녀는 6·25 피난 중에도 불어를 공부했으며 파리로 1년 먼저 건너가 미술관, 화랑을 다니며 예술 이론들을 공부했다. 또한 김환기가 뉴욕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니스, 브리첼 등의 도시에서 전시회를 개최하며 남편의 예술을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김환기 사후 그녀는 92년 환기미술관을 세우고 젊은 작가들을 후원한다. 자신 역시 예술적 감성이 풍부했던 그녀는 남편의 인생을 다룬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를 비롯한 여러 수필집을 펴내고 다양한 문화예술인들과 교류했다. 김환기가 추상 미술의 거장으로 우뚝설 수 있었던 데에는 남편의 예술을 존중했던 아내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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