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수 석사과정
(교육학과)
하이데거는 ‘존재자’를 통해 ‘존재’를 느낄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존재는 존재자의 ‘있음’과 ‘무엇임’을 결정해준다. 그의 개념을 빌려보자면 총학생회가 존재함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인식하게 해줄 ‘총학생회’라는 존재자가 인식의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 학생들이 총학생회가‘있고’,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총학생회라는 존재자가 학생들 옆에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부재에 익숙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존재’는 느낄 수 있지만 ‘부재’를 느끼려면 ‘존재’를 먼저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총학생회의 존재조차 잘 알지 못한다. 이러한 장기간의 부재는 곧 존재의 부정으로 연결된다. ‘왜 총학생회가 있어야 하는가? ’하는 토론조차 진행되지 못하는 관악의 현실, ‘총학생회가 뭐야?’라는 질문이 나오는 상황은 오랜 총학생회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총학생회라는 존재는 학생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져갈 뿐이다. 계속되는 부재는, 총학생회라는 존재를 학생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워버릴지도 모른다. 부재에익숙해지는 것이다.

총학생회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은 학생들 곁에서 존재하는 데 실패했을 뿐이다. ‘도청’으로 기억되는, 2010년의 총학생회를 뽑는 2009년 말의 선거에서 불거진 선거부정 의혹 이후로, 11월 선거는 단 한 번도 성사되지 못하였다. 거듭된 재선거는 학생들의 피로감을 극대화하였고, 총학생회에게 제대로 된 동력을 제공하지도 못했다. 거기에 2010년의 연석회의를 비롯하여 2011년의 봄 선거와 2012년의 봄 선거로 당선된 총학생회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학생들에게 인식시키는 데 실패했다. 2011년의 본부점거 사태에서 잠시나마 총학생회의 존재를 재확인하는 듯하였으나, 점거의 해제 과정에서 도출된 원자단위와 각 정치조직들 간의 첨예한 갈등은, 그나마 되살아난 것처럼 보였던 총학생회의 조그마한 모습마저 완전히 지워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혹자들은 학생들이 더 이상 총학생회라는 담론에 관심이 없다고들 말한다. 더 나아가서 이제는 과거와 달리, 총학생회를 통해 내보일 학생들 스스로의 의견이 없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는 총학생회의 ‘부재’가 만들어낸 인식이다. 이미 많은 이들이 부재에 익숙해진 탓에 존재가능성을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여전히 높은 동아리 참여율이나 각종 행사에의 학생들을 보면, 아니면 학내 이슈가 불거질 때의 여론을 살펴보면, 여전히 학생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모아낼 창구를 필요로 하고 있다. 다만 ‘고전적인’ 학생회 구조가 이를 뒷받침하지 못했을 뿐이다. 새로운 존재자가 필요하다. 부재의 논의도 존재의 기반에서 이뤄져야 한다.

다시 말해 지금 필요한 총학생회는 학생들 곁에서 존재하는 총학생회이다. 새로 생길지도 모르는 총학생회는 이점에 유의해야 한다. 새로운 총학생회는 자신의 존재를 학생들에게 강하게 어필할 수 있어야 한다. 달마다 돌아오는 달력사업에 치여 살다보면 총학생회의 존재는 학생들에게서 자연스레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학생들에게 다시금 부재의 기억을 심화시켜줄 뿐이다. 새로 만들어질 총학생회의 존재가 학생들 곁에서 인식될 수 있도록 후보진과 집행부가 치열하게 고민해 보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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