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 로버트 M. 피어시그,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장경렬 교수
(영어영문학과)

제주도에는 ‘애월’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처럼 예쁜 이름 안의 ‘월’은 달 월(月)이 맞지만, ‘애’는 사랑 애(愛)가 아니라 물가 애(涯)다. 물론 단순한 ‘물가’가 아니라 삼수변(?)과 절벽을 뜻하는 애(厓)가 합쳐져, 절벽의 물가를 말한다. 여기에다 ‘달’이라니, 이처럼 시적 정취가 넘치는 지명이 또 있을까. 바로 이 애월의 바닷가에서 얼마 전 그곳 문인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이어서 그들의 안내로 애월의 옛 포구를 둘러보게 되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숨이 막힐 만큼 멋진 방파제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다. 크고 작은 돌들을 촘촘히 쌓아올린 방파제의 정교한 짜임새가 정말로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문득 저 방파제를 쌓던 사람들의 손길과 정성을 상상 속에 떠올리는 순간, 내 마음 속에서 방파제는 피어시그가 말하는 한국의 ‘성벽’과 겹쳐졌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로버트 M. 피어시그 저/장경렬 역/문학과지성사


피어시그는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서 소설의 주인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방황을 하다 보니 그는 군대에 들어가게 되었고, 군대는 그를 한국으로 보냈다. 그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거기에는 하나의 단편적 영상이 있다. 그것은 뱃머리에서 보았던 성벽의 영상이다. 안개 낀 항구를 가로질러 보이던 성벽, 마치 천국으로 향하는 문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던 그 성벽의 영상이 그의 기억에 단편으로 남아 있다. 이 영상을 그는 소중하게 여기고 수도 없이 되풀이해서 머리에 떠올리곤 했던 것이 틀림없다.” 소설 속에서 되풀이해서 언급되고 있는 이 ‘성벽’―한국의 어느 항구에서 본 ‘성벽’―에서 소설의 주인공은 지고의 ‘질(質, quality)’을 감지한다. 아마도 그가 성벽에서 받았던 인상은 내가 저 방파제를 보고 받은 인상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리라.

도대체 어떤 소설이기에 이처럼 한국에서 본 ‘성벽’을 극찬하고 있는 것일까. 간단히 소개하자면,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은 주인공이 아들과 함께 미국의 미네소타 주를 떠나 캘리포니아 주의 샌프란시스코까지 여행하는 동안의 기록을 담은 여행자 소설이다. 하지만 이런 부류의 소설에서 으레 빠지지 않는 여행지의 사람들 삶이나 풍광에 대한 묘사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소설의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은 주인공이 모터사이클을 타고 달리는 도중 그의 머리를 스치는 과거의 기억들과 상념들이다. 그리고 그런 상념들과 기억들은 ‘가치에 대한 탐구’라는 이 소설의 부제가 말해 주듯 주로 ‘가치’ 또는 ‘질’의 문제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와 관계된 것들이다.

사실 ‘객관적 지식’에 절대적 가치를 두어 온 서양―그리고 오늘날 세계 모든 곳―의 지적 탐구 과정에서 ‘가치’는 주관적이고 사적인 것이라는 이유로 외면되거나 배제되어 왔다. 하지만 내가 지금 옛 포구의 방파제를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듯 가치는 우리의 현실이자 삶 자체에서 뺄 수 없는 요소다. 이 필연의 요소에 대한 기나긴 탐구 과정 끝에, 주인공은 “질은 정신의 일부도 아니고 물질의 일부도 아”닌 것, “정신과 물질 모두와 관계없는 별개의 것, ‘제3의’ 실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가 보기에, “주체와 객체가 질의 동인(動因)으로 잘못 추정되어” 왔지만, 오히려 ‘질’은 “정신과 물질을 탄생케 한 근원적 사건”이다. 그는 질의 개념을 『도덕경』의 ‘도(道)’에 상응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세계를 주체와 객체를 나누고 그 관계에 대한 탐구에 집착해 온 이른바 ‘이성주의 철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지적 탐구 과정을 담고 있는 이 소설과 내가 처음 만난 것은 내 나이 30대 초반의 일이었다. 당시 미국의 한 대학에서 문학 이론을 공부하던 도중 우연히 이 소설과 만났고, 이 소설로 인해 나는 나의 학문적 관심사였던 비평의 객관성과 가치 판단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울러, 이로 인해 인간의 삶과 세계를 보는 새로운 방법에 눈뜨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 나는 이 소설과의 만남이 20대에, 그것도 초반의 나이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끊임없이 아쉬워하곤 했다. 만일 그랬었더라면, 그 이후 삶을 살아오면서 또한 문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걸어 왔던 길은 전혀 다른 것이 되었을 수도 있었으리라. 아니, 도저히 논리화와 이론화의 틀에 가둘 수 없는 인간의 삶과 문학이라는 무정형의 세계에 대한 탐구 과정에 이어져 온 나의 지적 방황은 좀 더 의미 있는 것이 되었으리라.

그런 아쉬움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틈틈이 학생들에게 소개해 왔고, 마침내 번역까지 하게 되었다. 소설에 대한 번역이 끝나고 책이 출간되었을 때 한 신문기자가 나에게 물었다. “당신은 당신이 읽었던 소설 가운데 이를 최고의 작품으로 꼽을 수 있겠는가.”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러했다. “그렇다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인생 탐구와 진리 탐구의 문턱에 들어선 대학생들 누구에게든 반드시 읽어 볼 것을 권유하고 싶은 그런 책이긴 하다.” 이어진 신문기자와 나 사이의 대화는 이러했다. “목침으로 사용하기에 딱 알맞은 두께에다가 이해하기에도 쉽지 않은 내용의 이 소설책을 학생들이 좋아할까?” “읽다가 이해하기 어려우면, 목침 삼아 책을 베고 잠을 자면 되겠지.”

바다의 신이 잠을 잘 때 목침 삼아 베었음직한 장엄한 방파제에 다시 눈길을 주며, 나는 다시 소설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한국에서 보았던 성벽은 기술 공학적 행위의 산물이었다. 아름다웠지만, 이는 노련한 지적 기획 때문도 아니었고, 작업에 대한 과학적 관리 때문도 아니었으며, 그 성벽을 ‘멋들어지게’ 하기 위해서 과외로 지출한 경비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이 아름다웠던 것은 그 성벽을 쌓는 일을 하던 사람들이 대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독특한 방식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초월의 상태에서 그 일을 제대로 하도록 자신들을 유도하는 방식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그들 자신과 일을 따로 분리하지 않음으로써 일을 그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 저 방파제가 그처럼 아름답고 매혹적인 것은 돌을 날라다 쌓던 사람들이 “자신과 일을 따로 분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애월의 옛 포구를 감싸고 있는 방파제에 눈길을 고정한 채 나는 한국인 고유의 장인 정신을 떠올리기도 했고, 바닷가의 아스라한 절벽 대신 방파제를 배경으로 하여 떠 있을 법한 달의 모습을 그려 보기도 했다.


장경렬 교수
(영어영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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