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한편]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2012): 이안 감독의 모험·드라마 영화.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파이’의 가족들은 정부의 지원이 끊기자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다. 하지만 동물을 싣고 항해 중 폭풍우를 만나 화물선이 침몰한다. 가까스로 구명선에 탄 파이는 호랑이인 리처드 파커와 둘이 남게 된다. 파이는 구명선에서 발견한 생존 지침서를 바탕으로 리처드 파커와 함께 바다 위에서 살아가는 법을 습득하게 된다. 영화는 이처럼 동물과 인간의 교감을 다채로운 영상미를 살리며 보여준다.

 

삽화: 강동석 기자 tbag@snu.kr

 


스크린 속 동물들은 대개 애니메이션에서처럼 의인화되거나 재난 영화에서처럼 자연의 미적 조화 뒤에서 터져나오는 압도적 광포함을 표상한다. 친부 살해의 누명을 쓰고 쫓겨났다 삼촌의 야욕을 징벌하러 귀환하는 「라이언 킹」의 왕자 사자는 오이디푸스와 햄릿의 디즈니식 변주에 다름 아니며, 생명공학이 창조한 「쥬라기 공원」의 공룡들은 동물원의 경이로운 볼거리에서 통제 불가능하게 미쳐날뛰는 괴물로 순식간에 변모한다. 어느 경우든 동물은 그냥 동물이 아니라 인간적 관점에서 주체화되거나 대상화되는 것이다.


◇동반자적 동물=「라이프 오브 파이」는 이런 인간중심주의에 흥미로운 여백을 제공하는 주류 영화다. 동물원 집 아들 파이는 첫 대면한 호랑이 얼굴에서 영혼을 느끼지만, 아버지는 그것이 아들의 투사된 감정에 불과함을, 얼굴은 내면의 창이 아니라 보는 이의 거울임을 일깨운다. 진정 호랑이는 파이의 감수성을 무참히 짓밟듯 먹이로 던져진 염소를 가차없이 잡아먹어버린다. 여기까지만 해도 동물은 인간의 친구 아니면 적이라는, 귀엽거나 해롭거나(pet or pest)의 익숙한 이분법을 넘어서진 않는다. 야생동물을 애완동물로 만들기 위한 돌봄(care)은 늘 우리 자신을 보호할 우리(cage) 속에 동물을 가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 또한 자명하다. 흔히 인간사회 내부의 비주류 타자들을 향한 환대와 관용의 제스처가 주류 기득권이 위협되지 않는 수준에서, 타자들이 이를 수용한다는 전제 하에 제한적으로만 취해지듯.

파이가 망망대해 위 구명보트에 호랑이와 단둘이 마주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캐나다 이민을 추진한 인도 일가족의 소시민적 꿈은 난파되고, 직선적 항해의 근대적 시간은 원시적 표류의 신화적 시간 속으로 좌초한다. 자신의 인간적 우위를 보장해줄 사회 체제에서 완전히 이탈된 파이는 바로 앞의 야수처럼, 그것의 살해가 죄가 되지 않는 법적 예외 상태 속에서 인간성의 옷을 내던진 헐벗은 생명(bare life)으로 전락한다. 살기 위해서는 죽여야 하므로. 하지만 물에 빠진 호랑이를 죽일 절호의 기회에 그는 맹수의 얼굴에서 뜻밖에도 연약하고 위태로운 생명(precarious life)과 마주친다. 그는 도끼를 내려놓는다. 마치 그 타자의 얼굴이 그가 여러 종교를 유람하며 경배한 신들을 불러들이며 ‘죽이지 말라’는 윤리의 근원을 속삭이듯. 심지어 죽일 수 없는 것이, 타자는 내 존재를 침해하는 적대자이기 이전에 동일한 존재 바탕의 공유자인 까닭이다.

이때부터 우리 없는 우리편 만들기가 시작된다. 창살 없이, 작살 없이, ‘어린 왕자’가 여우를 길들이듯 파이는 호랑이를 길들인다. 이 관계는 일방적인 전유가 아니라 상호 생존의 전략으로 나타난다. 파이는 호랑이에게 먹거리를 던져주는 대신 살아갈 힘을 얻는다. 227일간의 해양표류기는 바로 그 존재론적 타자가 없었더라면 연명 자체가 불가능했을 한 인간의 동물에 대한 러브레터와 같다. 호랑이가 아파 쓰러졌을 때 파이는 그 커다란 육식동물의 상처입은 몸을 피에타처럼 끌어안고 어루만진다. 동물의 고통은 동화된 타자의 고통이다. 동물은 동료이고 반려인 동반자적 종(companion species)이다. 인간이 주인 자리를 떠나 자연의 한복판으로 들어설 때, 돌봄은 우리 없이 가능하다. 이는 얼핏 인간중심적 환대와 관용을 넘어선 타자성의 수락이자 포옹처럼 여겨진다.

⃟◇위태로운 선물=하지만 영화의 백미는 바로 그 둘도 없는 벗이 덧없이 사라지는, 일생의 님이 일순간 남이 돼버리는 장면에 있다. 풍랑 뒤 도달한 어느 섬의 정글 속으로 호랑이는 최소한의 작별 인사를 바라는 파이의 소박하고도 간절한 기대를 무심히 저버린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진다. 그러나 종간의 유토피아적 유대는 인간의 착각 어린 짝사랑에 불과했다는 불편한 진실이, 동물은 아무리 동고동락해도 동상이몽하는 타자일 뿐이라는 반인간적 자연의 본성이 핵심은 아니다. 오히려 이 가눌 길 없는 상실감이야말로 타자의 존재론적 선물성에 대해 숙고할 여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선물은 여기서 단순히 은유가 아니다. 월척을 낚을 때면 신이 준 선물이라고 감사하는 파이는 그 선물을 호랑이에게 선사하는 동시에 스스로 감정적으로 보상받으면서 주고 받기의 교환 관계를 다졌다. 무상의 선물은 원시적으로나마 일종의 경제 체제 속으로 이입되어 교환가치를 순환시킨 것이다. 파이가 호랑이에게 “굿바이”라 말할 순간조차 없었다는 사실에 눈물 흘릴 때 그가 잃은 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호랑이가 그에게 준 생의 의지라는 선물에 대해 “땡큐”라고 마지막으로 보답할 기회 자체, 그 보답이 호랑이의 뒤돌아봄으로 답례받을 수 있었고 그래서 동물 역시 인간과 맺은 선물 교환의 선순환 관계를 인지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었을 가능성 자체였다. 그러니까 파이는 여전히 인간중심적인 선물의 경제학에 매달려, 애인을 보내야하는 순간에도 대칭적인 기브 앤 테이크의 상징적 형식 속에서 서로 “그동안 고마웠어”라고 한마디 했어야 마음이 편한 것이다.

그러나 선물의 순수한 이념은 오직 보상도 답례도 없이 선사되는 데 있다. 감사나 부담조차 이미 선물-보답의 교환체계에서 비롯된 심리적 반응이기에, 순수 선물(pure gift)은 주는 자나 받는 자 모두에게 심지어 선물로 의도되거나 인식될 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자기모순적인 불가능한 선물이야말로 아무리 자본주의적으로 계산된다 해도 무언가를 선사하는 행위를 가능케 하는 동시에 그렇게 선사된 선물에는 실상 존재할 수 없는 역설적 관념이다. 즉 순수 선물은 선물 경제 속에서 제한적이나마 현실적인 교환의 형태로 봉합되는 한편 그러한 조건적 선물성을 정초하면서도 뒤흔드는 존재론적 사건 혹은 사태와 같다.

파이의 마지막 인간적인 욕망을 좌절시킨 건 끝내 포용할 수 없는 동물의 타자성이 아니라 바로 그 타자의 순수한 선물성처럼 보인다. 호랑이는 의도되지 않은 선물로 파이에게 주어졌고 되갚을 길 없이 사라졌다. 달리 보면, 오직 더 이상 선물로 보답할 수 없는 그 순간 사후적으로, 비록 파이 자신은 깨닫지 못했다 해도, 호랑이는 파이와 맺은 공존의 교환 관계에 속한 동시에 그 자체를 가능케 한 그 바깥의 불가능한 선물이었음이 드러난다. 이 우발적 현현으로만 존재하는 위태로운 선물(precarious gift)은 호랑이에게는 역으로 선물로 인식되지도 않았을 파이의 존재 자체에도 내재해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타자들은 껴안을 수 없이 가장 멀어진 순간 오히려 이 존재의 위태로운 바탕을 횡단하는 아스라한 선물성으로 교차한다. 진정 주인 없는 환대와 조건 없는 관용 역시 인간적인 대칭적 교환에 비대칭적으로 잠복해있는 이 불가능한 선물성으로만 가능하다. 굳이 신의 선물이라고 하지 않더라도, 존재는 그렇게 증여되고 증발한다. 이 운명을 파이는 조금만 슬퍼하고 더 많이 사랑해도 괜찮을 것이다.

⃟◇가시성의 배후=역설적이게도, 끝내 붙잡을 수 없는 호랑이 이야기인 「라이프 오브 파이」는 호랑이의 코털 하나까지 실재보다 더 실감나게 재현한 3D 디지털 이미지의 최첨단 향연이다. 「아바타」가 완성 단계로 끌어올린 3D 기술은 인물이 관객 코 앞으로 돌출해 오는 듯한 전경화뿐 아니라, 이제 바다와 우주가 무한히 스크린 뒤로 펼쳐지는 듯한 후경화에서도 토탈 시네마의 환영을 극사실적이면서 또한 초현실적으로 구현해낸다. 그러나 길어질 논의를 줄이며 지적해둘 한 가지는 신성한 무한의 숭고한 체험조차 강박적으로 미적인 프레임 속에 채색하고 포장하는 이 가시성의 욕망 뒤에 가려진 실재이다. 사실 파이를 위협하는 호랑이 따위는 없다. 그 존재론적 타자는 관객에겐 오직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커버된 맹점의 위치에서 끝없이 변조 가능한 단일 이미지로 봉합되었을 뿐. 디지털 기술은 이미 셀룰로이드의 지표성을 애니메이션의 도상성으로 대체하면서 영화 이미지의 본질과 범주를 교란하고 확장해왔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하지만 이 압도적 기술문명이 복사해내는 완벽한 자연 속에 재현 불가능한 블랙 홀을 하나 남겨둔다. 호랑이가 걸어들어간 정글의 어두운 입구는 아마도 존재의 위태로운 선물성이 거처하는 보이지 않는 숲 속의 공터에 대한 시각적 징후일 것이다. 카메라는 호랑이를 뒤좇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는 꽉찬 화면에 선물처럼 여백을 남긴다.

정승훈 교수
(뉴욕대 아부다비캠퍼스 영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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