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9일, 유엔 인권위에서는 킬러로봇의 개발 및 사용을 금지하는 국제협약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보던 살인기계가 20년 내 실용화될 전망이라고 한다. 사실 킬러로봇은 현재 맹활약 중이다. ‘드론’으로 불리는 무인 폭격기는 지난 4년동안 ‘테러리스트’ 3천여명을 살해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미군 희생을 줄이고 또한 경제적 부담이 적다는 이유로 생포보다는 사살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킬러로봇의 지지자들은 인명 손실을 최소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전쟁의 소멸까지 기대하는 듯하다. 그러나 힘의 극단적인 불균형이 존재하는 한, 평화는 오히려 지속될 수 없다. 일방적인 힘의 우위는 강자의 판단 착오를 초래할 것이다. 자신의 피해에 대한 우려가 전쟁을 회피하도록 했다면, 이제 그런 억제력은 사라지고 만다. 한편, 약자들은 결국 유일한 반격 수단인 테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전쟁은 군인과 군인의 전투가 아니라 민간인 살해의 반복으로 변질되고 만다. 힘의 비대칭은 그렇게 평화가 아니라 끊임없는 공포와 증오를 가져올 것이다.

진주의료원 폐쇄를 둘러싼 논란이 2달 넘게 계속되고 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취임 두 달여 만에 가난한 도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공공병원의 폐업 결정을 내렸다. 여론이 악화되자 도지사는 ‘강성노조’와 ‘귀족노동자’를 이유로 들었다. 폐업 결정 이후 벌써 22명이 사망한 비극적 현실에서도 예의 그 ‘절대반지’는 유감없이 위력을 발휘했다. 폐업은 더 이상의 의문이 필요없는 정당성을 확보했고, 도지사는 여권의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로 떠오르고 있다. 연봉 3500만원의 ‘귀족노동자’들을 징벌하는 ‘성전’에서 의료 공공성과 환자들의 생명권에 대한 논의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민주적 논의 과정은 생략된 채, 정책은 철저히 힘의 논리에 의해 결정된다.

삽화: 선우훈 기자 mrdrug@snu.kr

 

공공의 적을 호명함으로서 권력을 가지게 되는 것, 그리고 그 적을 겨냥함으로써 자신의 행위에 면죄부를 받는 것은 우리 역사에서 그리 낯선 모습은 아닌 듯하다. 제주도민에 대한 서북청년단의 학살이 정당화되었던 것처럼, ‘빨갱이’와 맞서 싸우는 자는 폭력의 권리를 가질 수 있었고 그들의 행위는 무조건적 승인을 받아왔다. 최근 반복되는 어버이연합의 난동과 일베의 사이버 테러가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는 데서 보듯,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온다. 불행히도 이러한 권력화 과정은 국가 차원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국가 정보기관이 민간인을 사찰하는 것이 밝혀졌을 때에도, 심지어 선거에 개입함으로써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었을 때에도, 그들의 행위는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는다. 그들이 ‘국가안보’의 최전선에 있는 숭고한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행위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이미 결론이 주어지는 모습들은 사회 전반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점점 더 촘촘한 위계 질서로 짜여지고 있으며, 누구도 위계질서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힘의 우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행동을 하든 무조건 정당화되는 사회에서, 힘을 가진 자가 폭주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리라.

어쩌면 당신은 누군가에게 라면을 끓여내라며 큰소리를 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갑’이 된 듯 만족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강자에 대한 통제가 부재한 곳에서, 그리하여 약자의 권리 침해가 당연시되는 곳에서, 이처럼 힘의 차이가 공동체의 결정을 좌우하는 곳에서, 거인은 성벽을 뚫고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김경근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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