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 이 책] 『미학적 힘』

미학적 힘

크리스토프 멘케 저/김동규 역/그린비/200쪽
범람하는 자기 계발서들이 말하는 것처럼 목적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대변할 수 있는가? 성공의 유의어처럼 사용되는 ‘삶의 목표’란 표현이 범람하고 있기에 지금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시의적절한 문제제기로 보인다. 목표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행위적 삶은 행위의 여백, 삶 자체의 풍요로움을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크리스토프 멘케 교수는 그의 저서 『미학적 힘』에서 이러한 인간관에 대항해 ‘근원적 인간성’을 복원시키고자 한다. 그는 예술가가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활동하지 않는다는 역설적인 무능력을 대안적 행동 양식으로서 제안한다. 또 저자는 이 목표에만 정향된 ‘할 수 있음’의 도그마는 ‘창조와 동떨어진’ 황폐한 행동 양식을 낳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가 요청하는 것은 미학으로부터의 새로운 인간학이다. 목적에 휘둘리지 않는 미학적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미학적’이라는 수사는 오늘날 그 사용이 남발되면서 의미가 오염됐다. 그토록 애매하고 복잡한 미학이라는 학문 영역을 멘케는 ‘힘’이라는 키워드로 정리한다. 힘은 곧 오성과 대비되는 의미의 감성으로 데카르트는 이를 규정할 수 없는 것으로 선언한 바 있다. 주체성 너머의 분명치 않은, 그러나 분명히 강력한 영향력을 내뿜는 이 힘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해 멘케는 이를 중심으로 새로운 미학사를 스케치한다.

그는 먼저 근대 미학을 최초로 성립한 바움가르텐의 이론으로부터 출발한다. 바움가르텐은 ‘감성을 정의내릴 수는 없지만 재인식할 수는 있다’는 통찰 아래 감성의 ?어두운? 힘을 인정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그 전까지 주체 바깥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감성적 성취까지를 주체의 활동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바움가르텐은 감성을 규명할 때 주체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는 점에서 오류를 범한다. 감성을 말할 때 포커스가 맞춰져야 하는 부분은 바움가르텐에 의해 처음 제기된 ‘힘’ 개념이다. 멘케는 이러한 인간학적 근원을 ‘미학적 본성’이라 명명한다. 우리가 미학적 본성, 힘의 ?어두운? 유희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매끈하지만 건조한 목적 중심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이 이 미학적 본성을 향하게 되는 것이 무의식적 힘이 주체에 선행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일종의 ‘퇴행’이라 말할 수 있다. 여기서 퇴행의 개념은 ‘시간적으로 앞선 시기로 간다’는 사전적 정의 때문에 현재의 실천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퇴행의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인간이 경험하는 감동과 같은 현재적이고 미학적인 ‘사건’이다. 여기서 미학적 본성에 대한 지향을 한 사건으로서 정의하는 것은 미학적 인간과 그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를 적극적으로 연결시켜 준다는 점에서 중요해진다. 이 과정을 부연하자면 이미 주체가 형성된 인간은 미학적 사건의 자극과 맞닥뜨리면 주체의 실천적 능력을 변형시킨다. 다시 말해 인간은 주체적 능력인 ‘사회적 실천’으로부터 동떨어지지 않고 대신 이를 무화시키며 동시에 어두운 힘들의 유희로 변형시킨다. 실천과 긴밀히 연결된 동시에 그로부터의 파열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는 미학적 본성의 원리를 멘케는 “비-미학적인 것의 미학화”로 명명한다.

바움가르텐에 의해 논의의 단초가 형성된 ‘힘’, ‘미학적 본성’의 개념은 니체로 넘어가면서 삶에 대한 강력한 강령으로 작용할 수 있게 된다. 니체에게 삶에 대한 가장 좋은 선생님은 ‘예술가’다. 이들은 미학적 본성에 대한 도취에 “잡아먹히지 않은 채”로 도취와 유희할 줄 안다. 사회적 실천의 주체이기도 한 예술가는 이를 가능케 하는 목적 지향적인 행위 능력에 매몰되지 않은 채 새로운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 때문에 예술가는 어떠한 도덕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삶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

인간의 활동성을 행위로 개념짓는 사유는 필연적으로 도덕성에 묶일 수밖에 없다. 주체는 행위하기 위해 목적을 설정하고 이는 선악 구분과 선의 지향이라는 가치 판단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목적을 달성하지 않으면 선 또한 지향될 수 없는 이 행위 개념의 프레임을 타파한다. 이들은 대신 자기 안에서 고안된 자신만의 예술 규칙에 따라 사회적 실천을 변용하며 이를 무화(無化)시킬 줄 안다. 멘케에 따르면 이는 “활동에 대한 행위 개념의 권력을 깨트리는 것”이고 행위 대신 삶 자체가 들어서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다. 상상력의 해방을 부르짖은 68혁명의 주체들이 이 예술가적 삶의 모델을 추구한 대표적인 세대가 아니었을까.

68혁명의 여러 집단들 중 ‘상황주의자’로 분류되는 기 드보르, 르페브르는 개인들이 영위하는 일상적 삶으로부터의 변혁을 요구했다. 스펙터클에 대한 수동적 관찰 대신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인 ‘상황’을 요청한 이들은 ‘살아지는 삶’을 거부했다. 즉 삶 이전에 목적을 설정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은 권력의 미시적 통제에 대한 굴복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욕망을 현실로 간주하라’, ‘절대 일하지 말라’와 같은 이들의 구호들은 멘케가 말하는 예술가적 삶의 모델을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자본의 재생산에 일조할 뿐인 소시민들의 ‘목적’을 수행할 바에는 아예 행위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과격해보일 수 있으나 그만큼 강력하게 요청되는 이들의 ‘예술가적 무능력’은 자유를 박제하는 모든 것을 거부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을 부여한다.

그리고 목적의 횡포는 아직도 만연하기에 상황주의자들의 구호는 68혁명 이후의 세대들인 우리에게도 유의미하게 다가온다. 좋은 목적이 좋은 삶을 대변하는 이 자기 계발의 시대는 동시에 모든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죄책감의 시대이기도 하다. 이 시대를 관통하는 ‘어떤 것이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은 이 ‘어떤 것’이 기반하고 있는 무의식적 힘을 억압한다. 그러나 미학적 본성을 향한 역설적 퇴행, 어떤 새로운 것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은 지금-여기의 척박함을 반성할 수 있게 한다. 교훈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그러나 그 자체로 자유에 대한 교훈이 되는 예술가적 삶의 양식. 이러한 대안이 우리 삶 속에서 모범적이지만 삭막한 답안으로 존재하는 목적 중심의 행동 양식을 대신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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