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김동리 탄생 100주년

운명 그리고 구원

나는 별을 처다보면서 언제나 죽음과 선이를 생각하게 마련이었고, 그것은 그만큼 늘 슬픔이요, 두려움이기도 했다.(「소꿉동무 선이의 죽음」)

김동리는 유년시절부터 죽음을 비롯한 인간의 근원적 운명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으며 이는 평생에 걸친 그의 작품 활동에 투영됐다. 그는 다섯살 적 자신의 유일한 소꿉친구인 선이가 폐렴으로 죽는 사건을 겪으며 죽음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김동리는 자신의 수필을 통해 “선이가 죽은 뒤 오랫동안 누구와도 어울려 놀지 않았다”고 하며 “나의 작은 가슴에는 이날까지 씻어지지 않는 죽음이란 검은 낙인이 찍혔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때부터 죽음에 대한 허무, 공포와 같은 인간 운명의 실존적 한계가 김동리를 짓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의 죽음과 운명에 대한 고민과 함께 성장하던 김동리는 ‘범부(凡父) 김정설’의 사상을 통해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에 접근하게 된다. 범부는 김동리의 16살 터울의 형이었으며 동·서양철학에 조예가 깊고 특히 민간신앙과 자연합일을 기반으로 하는 화랑의 풍류정신을 ‘동방사상’이라 칭하며 자신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다. 김동리는 범부를 ‘반신적(半神的) 인간’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그에게 천재를 뒷받침할 만한 건강과 의지와 기회가 주어졌던들 공자나 기독에 준하는 일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하는 등 김동리의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자연합일과 무속신앙적 요소는 범부로부터 받은 영향이 크다.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

그러므로 ‘문학하는 것’은 먼저 ‘사는 것’이 아니어서는 아니된다. …(중략)… 우리의 이 공통된 운명을 발견하고 이것의 타개에 노력하는 것, 이것을 곧 ‘구경적(究竟的) 삶’이라 부르며 또 문학하는 것이라 이르는 것이다.(「문학하는 것에 대한 사고(私考)」)

인간의 운명을 고민하던 김동리는 자연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던지게 됐다. 그 결과 그는 삶을 영위하는 형태를 세 가지 층위로 구분했다. 금수(禽獸)가 사는 것과 같은 ‘기초적인 생명 현상’이 첫번째 단계라면 물질문명의 이기(利器)를 누릴 줄 아는 ‘직업적 삶’이 두번째 단계, 그리고 ‘구경적(究竟的) 삶’이 세번째 단계다. 구경적 삶은 자연을 포함한 만물 자체인 ‘천지(天地)’와 개인의 공통된 운명이 있음을 자각하고 그로부터 구원을 추구하는 삶을 의미한다. 김동리는 구경적 삶을 이상적인 형태의 삶이라고 하며 이를 통해 인간의 실존적 한계를 극복하고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 거름 한 거름 발을 옮겨 놓을수록 그의 마음은 행결 경쾌하여져, 멀리 버드나무 사이에서 그의 뒷 모양을 바라보고 서 있을 그의 어머니의 주막이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갈 무렵하여서는, 육자바기 가락으로 제법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가고 있는 것이었다(『역마』)

김동리는 구경적 삶에 도달한 인간상을 문학작품에 표현해냈는데 『역마』의 ‘성기’가 그 대표적인 예다. ‘역마살’의 사주를 타고난 성기는 그의 운명을 거부하는 할머니와 어머니에 의해 중이 되기도 하고 책장사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운명을 거부하는 행위 속에서 성기는 계연과의 사랑에 실패하며 더욱 불행해질 뿐이었다. 결국 성기는 ‘역마살’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자각하고 순응한 후에 구원을 얻게 된다. 김동리는 작품 말미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성기의 밝은 모습을 통해 구경적 삶에 도달한 인물을 표현한 것이다.

순수문학, 문학정신의 본령(本領) 

김동리는 인간 운명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시작되는 인간성 옹호를 문학정신의 본령으로 삼았으며 이 본령을 담고 있는 문학을 ‘순수문학’이라 칭했다. 김동리에게 순수문학은 기계문명에 대한 인간성 회복을 추구하는 ‘제3기 휴머니즘’과 관련된다. ‘제1기 휴머니즘’이 고대 그리스시대에 신화적 미신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한 인간성 회복을, ‘제2기 휴머니즘’은 중세 신본주의에 대한 르네상스의 인간성 회복을 의미한다면, 제3기 휴머니즘은 근대적 차원의 인간성 회복을 추구한다. 따라서 제3기 휴머니즘을 주창한 김동리는 당시 근대문명의 두 축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넘어선 ‘제3세계’를 구축하는 역할을 문학이 해야 한다고 봤다. 때문에 김동리는 순수문학의 현실 참여를 인정했으며 평론을 통해 “정치적, 사회적, 민족적 현실을 문학적 세포 속에 구현시켜야 할 것을 주장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해방 후 제3기 휴머니즘을 포기하면서 그의 순수문학은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순수문학론이 현실과 거리를 둔 채 인간의 운명과 구원에 집중하는 양상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그가 제3기 휴머니즘을 포기한 이유는 해방 후 자본주의, 사회주의 국가가 본격적으로 들어서면서 제3세계를 현실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인지했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김동리의 순수문학은 구경적 삶을 통한 인간의 구원을 담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됐으며 『등신불』, 『사반의 십자가』 등 작품이 이런 범주에 포함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때문에 그의 순수문학론은 “인간의 운명에만 집착한 나머지 당대 현실의 부조리를 외면한다”는 비판을 받으며 오랜 기간 논쟁의 한 가운데 위치했다. 이런 비판에 직면한 김동리는 평론 활동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적극 옹호했으며 이 과정에서 유진오, 김병규 등과 순수문학에 관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게다가 김동리는 현실 속에서 문단 권력을 적극 추구하면서 자신의 순수문학론과 모순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는 평론활동을 수단으로 삼아 문단 내 경쟁자를 공격하기도 했으며 문단 내 지위 유지를 위해 당시 대통령인 박정희를 찾아가서 「월간문학」 창간을 부탁한 일도 있다. 문학 속에서 세속을 벗어난 구원을 강조한 그가 현실에서는 세속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순수문학으로 한정될 수 없는 김동리의 문학세계

그는 해방주보사의 주필 겸 편집국장이란 명함과 그 창간호 이래의 매호 일부 씩을 가지고 모든 회사의 중역과 금융 재계의 유력자와 반민자 모리배들을 방문하고는 반 구걸 반 위협으로 거액에 가까운 돈을 긁어모았다(『해방』)

하지만 조남현 명예교수(국어국문학과)는 “김동리는 순수문학뿐 아니라 현실 참여적인 작품도 많이 남겼다”고 지적한다. 『해방』, 『두꺼비』, 『형제』 등이 현실참여적 소설로서 해방 후와 전쟁 중 벌어지는 부조리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김동리의 작품세계를 순수문학으로 한정시킬 수 없으며 다른 각도에서 재조명할 여지가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김동리는 1934년 등단한 이후 1995년 타계할 때까지 소설뿐 아니라 시, 수필, 평론 등 다양한 문학영역에 걸쳐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때문에 그의 문학세계를 하나의 성격으로 규정짓기는 어렵지만 수많은 작품 속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메시지는 ‘인간 운명이 처한 실존적 한계로부터의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김동리는 인간의 구원 즉, ‘자유’를 꿈꿨던 사상가였다.

사진: 정승호 기자 sungho71@snu.kr
사진: 정승호 기자 sungho71@snu.kr

김동리 문학을 재조명하다

지난달 26일(금) 김동리의 고향인 경주에 위치한 동리목월문학관에서 「동리목월기념사업회」 주관으로 ‘김동리 탄생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이 개최됐다. 이날 학술대회는 여덟번째로 열리는 ‘동리목월문학 심포지엄’의 일환이며 김동리만을 논의 대상으로 삼아 「김동리 문학을 재조명한다」로 총 네 발표가 진행됐다.

기조발표를 맡은 동리목월문학관 장윤익 관장은 김동리 문학사상의 역사적 연원을 고찰했다. 장 관장은 “김동리 작품의 연구자들은 그의 작품세계를 무속적인 면이나 한국 고유 신앙의 면에서 해석하고 있다”며 “이는 단군 시대의 홍익인간까지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밝혔다. 단군 시대의 홍익인간과 그와 동시대에 공존하던 샤머니즘이 신라의 화랑정신으로 계승됐으며 고려의 불교와 조선의 유교사상 속에서도 그 명맥이 끊기지 않고 유지되며 동학의 ‘인내천 사상’과 김동리의 형인 범부의 ‘동방사상’에 역사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에 백시종 한국소설가협회장은 “김동리 문학에서 역사의식은 순수문학, 구경 생명문학에 가려져 표면에 나선 적은 많지 않다”며 이번 연구의 의의를 찾았다. 하지만 백 회장은 “김동리 문학의 정체성과 민족사상이 어디까지 일치하는지 그 경계가 모호한 면이 있다”는 지적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어진 발제에서 신정숙 강사(연세대 국어국문학과)는 “김동리 문학이 세계문학에서의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해 이목을 끌었다.(사진③) 신정숙 강사는 “근대성의 경험으로부터 파편화된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소외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며 “이 현상은 근대의 모든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인 문제”라고 전했다. 김동리는 근대 인류에게 근원적으로 내재된 이 문제를 ‘문학하는 것’으로 극복하고자 열망했으며 이는 그의 평생에 걸친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재현된다.

사진: 정승호 기자 sungho71@snu.kr
또 신정숙 강사는 김동리의 문학이 “보편성 속에서도 그 나름의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했다.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서양의 문학에 등장하는 인물은 신에게 의지함으로써 구원을 얻지만 『무녀도』의 모화처럼 김동리 문학에 등장하는 인물은 ‘신을 내재한 인간형’이며 스스로 자연과 합일됨으로 구원을 얻는다. 김동리 고유의 구원에 도달하는 인간상을 표현한 것이다. 게다가 구원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김동리 문학은 종교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채형 소설가는 “요즘 시대의 화두인 힐링과도 결부돼 위로받고 싶은 현대인들에게 의미를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이와 함께 김동리 문학연구의 토대를 재검토하는 차원에서 김주현 교수(경북대 국어국문학과)는 “새롭게 발굴되고 있는 김동리 작품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을 제기했다. 김동리는 평생에 걸쳐 수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이미 1968년 8월까지 117편의 소설을 남겼다. 이에 많은 연구자들이 소실된 작품을 발굴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왔으며 1994년부터 올해까지 29편의 소설이 새로 발굴됐다. 김 교수는 “김동리 문학의 전체상을 규명해내기 위해선 새로운 작품 발굴이 필수적”이라고 했지만 “발굴된 작품에 대해 체계적인 분류가 미흡한 면이 있어 기존과 다른 작품인지 이전 작품의 개작인지에 대한 구분조차 이뤄지지 못한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더불어 김 교수는 김동리가 소설만 창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소설뿐 아니라 시, 수필 등 다른 장르의 작품을 발굴한 필요도 있다”며 새로운 과제를 제시하기도 했다.

장윤익 관장은 이날 인사말을 통해 “올해 김동리 탄생 100주년을 맞아 김동리 선생에 대해 재평가해야 할 시기가 왔다”며 “때문에 그를 재조명하는 학술대회를 기획했다”고 의의를 밝혔다. 학술대회뿐만 아니라 장 관장은 “「무녀도동리」라는 제목의 뮤지컬도 올 9월 공연될 예정”이라며 추후 계획을 밝혔다. 지난 2일에는 대산문화재단에서도 ‘김동리 탄생 100주년 기념 문학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탄생 100주년에 맞춰 학계와 문화계 전반에서 김동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김동리 문학세계의 가치가 새롭게 재조명될 수 있을지 기대된다.

사진: 정승호 기자 sungho71@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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