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중 교수
(사회학과)
60년대 후반의 서울 거리. 한 커플이 만났다. 커피 값이 없어 거리를 방황한다. 모래바람은 모질게도 불어온다. 무능한 이 연인에게 미래는 없다. 아이를 지우기로 결심한다. 수술비를 구하기 위해 남자(신성일 역)는 친구들을 찾아다니고, 결국 부유한 속물 친구의 외투에서 돈뭉치를 훔친다. 여자가 수술을 하는 사이, 사내는 거리로 나서 술을 마신다. 술집에서 그는, 나른하고 권태로운 여인을 유혹한다. 그들은 깊은 밤이 지나도록, 자리를 옮겨가며 술을 마시고, 허름한 공사장에서 정사를 나누고자 한다. 그때 휴일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정신을 차린 듯, 주인공은 병원으로 질주하지만, 여자도 아이도 모두 죽어 있었다. 어둔 거리를 비척거리며 폐허 같은 얼굴로 그는 중얼거린다. 내일은..... 머리를 깎아야겠다, 머리를 깎아야겠다.

이만희 감독의「휴일」(1968)의 줄거리이다. 작품의 첫 장면을 보는 순간, 이것이 걸작임을 직감한다. 말할 수 없는 비애와 좌절감, 그리고 삶에 대한 보편적이고 원초적인 고민이 밀려왔다. 감독이 지휘한 카메라가 1968년의 한 오후 포착한 서울 거리의 잊을 수 없는 풍경은 약 반세기를 격하고, 그 모습을 완전히 상실한 다른 풍경을 사는 사람에게, 영원한 실존으로 육박해오고 있다. 허름한 건물들과 택시의 내부, 간판에 새겨진 글씨의 서체와 단순하고 선명한 네온사인들, 주름진 얼굴과 담배의 연기, 지붕과 담벼락의 질감, 이 모든 삶의 디테일들 앞에서 내가 관념으로 획득한 60년대 후반 한국사회에 대한 이미지와 지식의 체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감지했다. 어떤 생생한 영원성이 거기에 있었다. 한 시대의 본질은 시대정신이 아니라, 순간적이고 보잘 것 없는 세부들, 그러니까 가령 헤어스타일이나 여자들의 화장법에 담기는 것이다. 그런 '모더니티'(보들레르) 혹은 '지각과 정동의 블록'(들뢰즈)을 창조하는 것이 예술가의 권능이다. 이만희는 작품의 모든 디테일에 헤어 나올 수 없는 비관주의를 새겨 넣었다.「휴일」이 2005년에 기적적으로 발견되기까지 상영되지 못했던 것이 그 때문이다.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도 검열관은 <휴일>의 인물들을 사로잡고 있는 암울함의 불온성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이만희의 인물들에게는 희망이 없다. 그들은 희망 없음을 직시한다. 발레리는 말한 적이 있다. 낙관주의는 천박하다고. 낙관주의가 숨겨지지 않을 때, 단지 천박할 뿐 아니라 위험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19세기 유럽인들이 그랬고, 지금 우리가 그렇다. 낙관주의는 실재를 아름답게 가리는 인식론적 베일을 드리운다. 상승하는 자들의 사유가 천박한 것은 그 때문이다. 몰락하는 자들에게만 허락된 것들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지성적, 예술적 개입을 통해 아름다움과 진리로 되살아나는 처참한 실재의 직시이다. 희망을 값싸게 팔아먹는 담론들의 달콤한 위안을 버리고, 차갑고 냉정한 비관주위를 통해서만이 도달할 수 있는 실재와의 대면이다.

「휴일」은 낙관의 각도를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그 어둠의 우직함으로 이 영화는 지금 우리 시대의 가장 고통스런 부분을 비추어주는 탐조등이 된다. 2000년대 한국 사회는 저 ‘미래가 없는 연인들’의 대규모 환생을 체험한다. 비정규직, 자살을 망설이는 자들, 경쟁에 짓눌린 학생들, 빚에 허덕이는 샐러리맨, 비참하게 늙어가는 빈곤한 노인들, 철탑에 올라가 시위하는 노동자들, 무너져가는 중산층의 가장들, 방사능과 중금속에 오염된 음식을 먹고 자라는 아이들의 부모들은 저 사내와 그의 애인처럼 불안하다. 미래가 있는 자와 미래가 없는 자, 사회는 이 두 계급으로 분할되어 있다. 미래를 둘러싼 결전이다. 미래가 없는 자들은 비관의 힘으로 가야 한다. 비관으로 연대하고 비관으로 소통한다. 나는「휴일」에서 비관의 정치학을 읽는다. 비관주의자들이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메시지를 읽는다. 미래의 재구성을 위하여 나의 사회학은 그의 영화처럼 더 날카롭게 어두워져야 한다고, 중얼거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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